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경훈.p257
론리플래닛 선정 최악의 도시? 서울
123위, 디트로이트, 가나 아크라, 서울
사람 많고 건물이 많이 모여 있다고 모두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도시다움을 방해하는 불순물에 관한 이야기
그동안 정체를 숨겨온 이 불순물들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며, 도시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을 몸으로 보여주는 반도시의 징후다. 아직,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1 걷는 순간, 비로소 도시가 탄생한다
길road vs 거리street
길이 이동과 도착이라는 목적 지향에 충실하다면, 거리는 경험이라는 과정 지향적 성격을 띤다
도시가 삭막하다는 것은 거리가 삭막하다는 뜻!
언어는 무의식을 반영한다? 길과 거리의 용어 혼용은 거리에 대한 오해의 증표이며, 나아가 도시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는 방증이다!
#뉴욕에서는 모두가 걸어 다닌다
“꿈만 같이! 내가 뉴욕 한복판에 있다니…”
“뭐가 좋은데요?”
“모든 걸 걸어 다니며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출근도 쇼핑도 박물관 가는 것도 걸어서 할 수 있다는 점이 서울과 다른 것 같아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은 계속 걷는다. 아무도 자동차를 가지고 있진 않다. 택시와 두 발로 걷는 것뿐이다.
걷는 일이야말로 도시 생활의 필수 요소이자 중요한 상징이며, 기쁨인 셈이다(만남의 거리)
‘서울은 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도시‘라는 프랑스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의 말처럼 서울에서 걷기란 고행에 가깝다.
걷고 싶은 거리와 걷고 싶은 길은 다르다
남산 소파길도 서울시에서 지정한 ‘걷고 싶은 거리’이지만 거리라기보다는 산에 난 길에 가깝다. 서울시는 도시공간에 자연을 도입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길과 거리의 개념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녹지나 공원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러니 걷기 힘든 거리로 이루어진 도시는 애초부터 도시가 아닌 것이다.
#2 거리는 어떻게 우리를 걷게 만드는가
도시에 대한 오해? 쇼핑몰!
쇼핑몰은 현대적이며 서구적이긴 하지만 도시적이지는 않다. 쇼핑몰은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도시의 거리를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가상의 거리에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쇼핑객들이 북적거리는 동안 실제 도시의 거리는 텅 비고 점점 더 피폐해진다.
‘걷고 싶은 거리’ 가로수길이 왜 떴을까? 1)공원이 없다 2)인도에 올라와 있는 자동차가 없다(공원과 인도주차가 없다)
#거리에는 사람이 있다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내가 누군가를 알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준다는 사실은 사소하지만 소중하다!
‘아는’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도시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가로수길과 같은 ‘우리 동네’에서 이웃들과 인사하며 지내는 삶을 꿈꾼다. 진정으로 걷고 싶은 거리,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를 말이다.
#도시의 계절은 쇼윈도에서 시작된다
동대문 운동장 베이시스디자인 센터 주차장 공간 설계 요구? 특급 호텔에도 주차장이 없는 현실에 익숙한 건축가에게 이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은 맨하탄 한 블럭을 다 차지하는 거대한 건물이지만 단 한 대의 자동차도 주차할 공간이 없다
어색한 거리, ‘광화문광장’?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
도시의 광장은 건물로 둘러싸였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모스크바 붉은 광장…)
광장의 마지막 조건? 상업시설! (도시의 거리는 상점이 즐비한 길을 말한다)
도시라는 한자? 도읍(都)과 시장(市)이 합쳐진 말!
그럼에도 건축에서만큼은 “상업적인 것은 안 돼”라는 위선적인 말 한마디가 서울을 도시에서 멀어지게 한다
쇼핑몰이 죽어야 도시가 산다? 쇼핑몰은 교외 전원생활의 유일한 결핍, 즉 도시적 풍경을 만든다. 다시 말해, 가짜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가장 반도시적인 건축? 쇼핑몰)
진정 도시를 걷게 만드는 것은 상점이다. 상점은 거리의 활력일 뿐만 아니라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며 보안등이자, 거리의 청결함과 쾌적함을 감시하는 거리의 파수꾼이다.
#3 마을버스에 마을은 없다
편리함을 위해 생긴 마을버스는 마을과 마음을 서로 멀게 만든다. 마을버스는 이 동네를 가장 값싸게 벗어나는 방법이다. 걸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웃과 마주할 기회보다는 지하철이 가까이 있지 않다는 불만이 더 크다.
편리하고 빠르다? ‘마을’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시골버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마을버스는 정감 어린 ‘마을’을 없애고 있다.
#차 없으면 연애도 못하는 도시
부자든 가난뱅이든 걷기는 뉴요커의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검은색 정장과 더불어 두툼한 가죽가방은 그야말로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이나 신문과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동차는 악어와 같은 양서류다. 인도와 차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동차의 모습은 분명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걷게 되면 왠지 사람이 초라해져서…”
도시에는 없지만 서울에만 있는 요소? 마을버스, 도시와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마을이라는 단어, 기형적인 교통수단
구색을 갖춘 서울의 도로율은 16.3퍼센트
통계의 마술은 어두운 이면을 숨기고 있다? (면적이 아닌 길의 관점에서) 인도가 없는 길의 비율은 76퍼센트!
‘전원도시’, ‘빛나는 도시’, 녹지와 쾌적함을 부르짖는 서울시 광고? 거리의 풍요로움, 얽히고설킨 대도시의 문화생활, 도시의 생태계를 무시하고 오로지 주거의 쾌적함에 초점을 맞춘 단순무식한 이론?!
거리에서 사람을 몰아내고, 동네 사람들 간의 소통을 단절하는 마을버스는 명백한 반도시의 증후이면서 그 증후를 악화시키는 원인인 셈이다.
#4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은 울타리가 있다(방음벽)
도시의 풍경은 자연과는 달리 시민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소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도시적이라면, 방음벽은 분명 반도시적 증표다. 아파트나 학교 주위를 둘러싼 방음벽은 도시성의 후퇴다.
도시성에 대한 철학과 의식이 부족한 건축가들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방음벽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
방음벽은 서울에만 있는 장벽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감옥 같은 학교에서 방음벽으로 잘린 네모난 하늘을 바라보며 자라는 것이다.
바람도 사람도 풍경도 모두 막아선다(21세기형 게토)
방음벽의 난립은 서울을 자발적인 게토로 만든다
두려움은 장벽을 세우고, 희망은 다리를 만든다.
방음벽의 넘어설 해결책은 있다? 그 불리한 조건을 방음벽으로 무리하게 개선하려는 것은 시장 원리나 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다
소음이 심한 곳에는 아파트가 아닌 건물을 지으면 된다. 환경이 맞게 설계하고 지어야 하는 것, 대지와 상관없이 똑같은 평면 구조를 고집하는 경우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대지에 적응한다
#’더 많은 자연을’을 외칠수록 서울은 활기를 잃는다
방음벽은 한국형 쾌적함을 대표한다
쾌적함을 한국 도시의 최대 목표이자 의미이며 발명이다
은평 뉴타운 모토? ‘리조트형 주거단지’
수치상 가장 쾌적한 도시? 서울!
대한민국 대표 도시 서울을 매력없고 불편하고 삭막하다고 느끼게 하는 데에는 역설적으로 ‘쾌적함’과 ‘자연’이 큰 역할을 한다
여전히 공원과 녹지는 서울시의 가장 큰 목표다. 잘못된 진단이 병을 키우듯, ‘더 많은 자연을’이라고 외칠수록 오히려 서울은 활기를 잃어간다.
친환경? 한국에서 유독 자연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휘하는 데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훌륭한 건축유산이 한몫한다. 자연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자연은 종교가 되고 신화가 되었다. 싸우다 않고 이기는 한국 건축의 위얻은 힘겨운 투쟁을 거쳐 자연을 재어하는 서양 건축과 바교해보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우리 건축의 몰아일체적 도취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알맹이는 사라졌다!
도시환경은 모든 것이 인공적이다.
자연이데올로기는 도시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도시 되기’ 에 실패한 서울? 자연은 자연다워야 하듯 도시는 도시다워여 하는 것이다
“자연과 문화는 대립적인 동시에 상호보완적”-레비스트로스
자연과 도시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적인 발상은 도시 문제에 있어서 효용이 없다
#5 ‘방’은 아무리 모여도 도시가 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집 안에서 이루어지던 행위의 대부분이 도시에서는 일종의 고유 공간으로 확장되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유 공간 대부분이 노래방, 찜질방처럼 ‘방’이라는 폐쇄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도시적 측면에서 보았을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방’ 문화는 기존 관계를 심화시킬 수는 있어도, 새로운 도시적 관계를 확장시키기에는 부적합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진짜 도시는 외로움을 달래준다
누군가 수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들
서울은 방의 도시다
서울의 공유 공간은 씁쓸하다. 도시의 생명은 바로 그 공유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풍경과 생명이 오히려 이러한 중간 영역, 공유 공간의 자리에서 가름된다
공유 공간에서 일어나야 할 커뮤니티의 형성과 이웃과의 교류가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폐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도시’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6 도시는 우리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새집증후군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용어다.
서울의 전체 건물 절반 이상이 지은지 20년을 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그러나 도시는 기억의 공간이다.
환기가 부족한 새집들, 무늬만 가구와 사이비 건축,
고급호텔을 능가하는 ‘인테리어’? 새집을 오염시키는 물질의 대부분이 실내 마감재에서 나온다(서울의 아파트는 공업용지 강력본드로 범벅이 되어 있다)
세상 모든 건물의 두 가지 건축 방식? ‘건식dry’과 ‘습식wet’
지속 가능? 빨리 짓고 빨리 다시 지어라
급식은 시공이 간편하고 빠르며 무엇보다도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현장 유연성 부여? 어차피 습식에서 정확한 치수는 기대할 수 없다!
습식 공법의 편견? 재료 전체를 풀로 결합했으므로 전체가 마치 하나처럼 단단할 것 같은 믿음이 있다. 사실은 그 반대다!
건축물도 끊임없이 정비해야 하는 기계다(수리가 불가능한 습식 건물, 조그만 기술이 있으면 수리가 가능한 건식건물)
#기억의 지우개, 소아병의 도시 서울
무늬만 나무고, 무늬만 들인 건축은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무늬만…건축’은 서울을 유례없이 어린 도시로 만들었다
600백년 된 서울? 75퍼센트 이상의 건물이 1980년 이후 지어졌다. 50년 넘은 건물은 2.43퍼센트에 불과, 20년 이하는 75퍼센트
서울은 시간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피터 팬의 도시이자 소아병의 도시다
문제는 50년 후에도…우리의 아이들도 우리 세대처럼 어릴적 기억이 말소된 ‘장소 상실의 도시’를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7 아파트는 도시의 미래가 아니다
가장 도시적인 주거 형태인 아파트가 서울에서는 오히려 도시를 해치는 주범이 되었다
주거라기보다 재산 증식의 의미가 강하고,
자신의 취향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타자의 건축’으로 성립한다. 시장이라는 괴물은 아파트에게 도시에서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바란다.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아파트의 미래는 도시의 미래 또한 어둡게 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공동 주택이 아니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의 아파트는 공동 주택이 되기를 거부한다
전세대 남향 아파트들? 모두가 남쪽을 향해 늘어선 영혼없는 좀비 같다
#8 모델하우스, 도시를 환각에 빠트려라
한구 아파트의 진정한 매력은 그 재산 가치에 있다
언제 박해를 받아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할 지 모르는 유대인들은 절대로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았다. 모은 재산은 구이나 보석으로 바꾸고 작은 여행용 가방 한다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몸집을 가볍게 했다
모델하우스는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사탕을 먹고 싶지만 결코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않고 칭얼대기만 한다(부재의 기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
욕망은 기본적으로 ‘결핍’ 또는 ‘부재’와 연관되어 있다
모델하우스는 한국에만 있는 건축? 모델하우스는 한국의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파트가 갖지 못해서 항상 욕망하는 것을 모아 만든 건축인 셈이다.
#9 서울은 꿈을 꾸고 있다
서울이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살고 있는’ 도시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시가 다르다는 것이다.
밤이 되면 서울대는 빛이 소곤거린다.
화려한 야경? 정작 문제는 다시 해가 떴을 때다
사진찍기? 사본이 원본을 압도할 때도 있는 것이다
서울에 필요한 것은 빨간 약이다. 소름 돋는 진실만을 보여주더라도 빨간 약을 삼킴으로써, 스스로 만들어낸 매트릭스에서 탈출해야 한다. 진실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법이다. 아직,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지엽적이고 사소한 몇 가지를 가지고 인구 천만이 모여 사는 서울을 도시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한 수 있다. 건축가 미스 반데어로에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도시는 이야기책이며 걷기라는 언어로서만 해독이 가능하다”-벤야민
서울은 이제 잠시 머무르는 타향살이의 장소가 아니다. 서울을 진정한 도시로 만들 때, 기억의 장소로 영원히 살아남는 진정한 우리의 고향이 될 것이다.
자연이 자연다워야 하듯 도시는 도시다워야 한다
마치 해묵은 병이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처럼 기쁘고 반갑고 그리고 분한 마음(이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이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단숨에 읽기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