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적 이성. 워너 본펠트. p357
State, Capital, and Class: On Negative and Subversive Reason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 국가, 계급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는 갑자기 순식간에 야만 상태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너무나 많은 문명, 너무나 많은 생존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이 있기 때문이다…부르주아 사회의 조건들은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부를 포용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사회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을 부득이 파괴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그 시장들을 더욱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국가는 부르주아 집행위원회
이 책은 자본이 그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근본적으로 착취관계라고 주장한다
국가 형태는 대다수의 인구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분리가 자본과 그 정치적 형태-즉, 국가-가 의존하는 사회적 기초이다.
인간의 생산력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분리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인간화는 피억압자들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을 파국이다(착취로서의 부의 생산 없이는 부의 재분배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은 언제나 위기내재적 세계시장 관계들이다(자본이 어디를 가든 계급 갈등이 따라간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고도의 불확실성 시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복이 진실로 인간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인간 조건들의 부정은 전복적 이성의 정언명령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신의 말이 곧 법이라며 스스로에게 만족했던 아담과는 달리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전능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에 반항했던 이브의 이야기를 읽는다.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계급에 대한 부정속에서만, 계급 없는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긍정(성)을 발견한다.
전복은 사회적 지식과 상상적 의식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인간해방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실천적 이성으로 바뀌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무언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니오’가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니오’가 그것에 반대하는 사회에 외부적이지 않고 그와 동일한 사회 내부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계급을 위한 정치(학)에서가 아니라 오직 계급에 대한 부정 속에서만 자신의 해결책을 발견한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전환되면서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로 대체되었다’-[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비판적인 사회이론의 임무는 경직된, 물질 같은, 응결된 관계들을 탈신비화하여 그것들의 직접성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판의 목적은 오히려 사회적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적 형태들을 해독decipher하는 것이다
개념이란 자신들의 형성을 요구하는 현실의 계기들이며, 모든 개념들이 비개념성들을 참조한다.
메타이론의 상술은 사회적 실존에 대한 이신론적인 개념화들이 가득한 ‘보이지 않는 손’의 교의와 유사하게, 무한회귀적으로 끝난다.
국가는 경제적인 것을 참조하여 설명되며, 경제적인 것은 국가를 참조하여 설명된다. 수요는 공급에 의해 설명되며, 공급은 수요에 의해 설명된다. 이런 악순환에 의해 설명은 동어반복이 된다.
물화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립된 것이 아니다.
가치는 ‘사물들의 관계로 표현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사회적 현상!)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사회적 현상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추적함으로써 그것의 사회적 내용을 해독하려고 노력한다.
거꾸로 뒤집혀져 있는 세계에서, 참된 것은 허위적인 것의 한 계기이다.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사유는 탈신비화함으로써 현실을 드러낼 수 있으며, 탈신비화는 인간 실천에 대한 이해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천이 본질적인 것이며, 사유의 목적은 전복적인 것이다.(탈신비화가 사유의 비판적 목적이다)
가치, 즉 인간의 값어치는 다른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매겨진 가격이다.
변증법은 사물들에 ‘대해서about’ 사고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사물들로부터 사고한다.
현상이란 본질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속임수를 부리지 않는다.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이다’
만약 전체가 그르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부정적인 조건들과의 화해를 꺼린다.
그릇된 친구들과 연대하고 그릇된 갈등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허위에 대항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러한 연대와 참여하는 모든 면에서 허위를 강화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역사 이전’이며, 인간이 더 이상 착취의 자원이 아니라 목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인간이 창출할 때 인류사가 시작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칸트의 비판적 계몽과 공명했다.
인간의 실천은 경제적 객관성의 단순한 인격화인 자본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반하여 존재한다.(마르크스의 비판의 핵심적인 ‘문제틀’)
독자적, 비판적 사유? 사유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서기를 감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블로흐
자본은 자신의 실체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을 전제한다
역사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모토? ‘모든 것을 의심하라!’ (de omnibus dubtiandem)
본질과 현상이 일치한다면 의심은, 그리고 그것과 함께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고 될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부정적인 조건들과의 화해를 꺼린다.
그의 비판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형태인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신비성을 발가벗긴다
전도된 사회적 실존? ‘공동체’의 전도된 형태들로 존재한다, 개인들이 항상 서로 ‘개인들로서’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이 추상적인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한다!
본질이 인간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면, 사회는 인간 없는 세계로 변형된다
노동이 생산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반대, 즉 자본을 생산함을 통해서만이다
물화된 비인격적 관계들은 단지 환상일 뿐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무관심이다.
계몽은 매우 전복적인 일이다! 계몽은 사물의 외관(현상)을 의심하며, 세계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 세계를 뒤집어 생각한다.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범주들이 마치 물질계 바깥의, 자연적인 사물들인 것처럼 다룬다
잘못된 예견들, 확정 불가능한 소프트 사이언스? 노벨경제학상은 폐지되어야 한다!-뮈르달
경제적 범주들은 비합리적인 세계의 합리성을 표현한다
#인간의 실천, 그리고 생산’되는’ 자본
‘인간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점점 그들을 예속화하는 현실을 생산한다
자본은 주체가 아니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의 규정적인 관계(양식)에 붙이는 이름이다.
설명되지 않고 단지 주장될 뿐이다
자본? 추상적 형태의 가장 보편적 부의 표현
사회적 적대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전도된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소외를 통한 사회적 갈등에 의존한다
현대 장치경제학은 흔히 세계화로 표현된다
세계화는 일국적으로 고정된 ‘케인주의적 재분배’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권력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획득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국익을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 매일매일의 활동은 전지구적 세력들에 의존, 사람들은 ‘복잡한 연계성’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에 휘말린다)
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자본의 경쟁 논리로 인해, ‘국내경제들은 전지구적 경제라는 지각된 긴급성에 종속’된다
‘위기들’을 예견한 마르크스의 고찰
‘세계시장과 위기’에 대한 기획된 연구는 단지 그의 연구의 종착지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오히려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모순들이 작동하고 또 그런 만큼 그 모순들이 가장 구체적인 형상을 갖고 나타나는 결론에 해당한다.
대외무역 없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생각할 수 없다
‘화폐’는 세계시장에 도달하게 되면 자신의 ‘국민적 제복’을 벗어 버린다
간단히 말해, 세계시장을 창조하는 경향은 자본 개념 자체에 이미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의 언어는 ‘가격’이며, 그것의 공동체는 화폐가 재현하는 추상적 부이다.
*자본은 태어날 때부터 전지구적 권력이었다
자본이란 비노동으로서만 자본이므로, 노동이 자본에 마주서지 않으면 자본도 자본에 마주설 수 없다. 자본은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교환 행위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며, 그럴 때 자본의 구체적인 물질성은 사라진다
자본은, 간단히 말해, ‘살아 있는 모순’이다. ‘인간 생산력’, 즉 부의 모든 발전은 대립적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의 목적은 이윤을 만드는 것, 국가는 이 목적의 정치적 표현이다(국가란 자본주의 국가다)
*신자유주의는 2008년에 분출된 위기로 그 자신의 뚜렷한 목적을 이루었다(생산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력)
트리클 업(trickle-up)? 서민층은 각종 부담만 지고 질적 이득은 상류층이 독식한다(비용의 사회화, 이윤의 사유화)
‘군사정부’의 목적은 피지배자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 고찰의 결과’이다-Friedrich
세계는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테러와 전쟁, 전쟁은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정의된다! 해방과 자유는 표면상의 해방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한된다. 속임수와 선전의 정치(학)는 거의 연극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사물들이 사물들과 맺는 관계라고 불렀다
인간 존재는 분리 불가능하다. 인간 존재는 무력과 폭력을 통하지 않는다면 생산의 경제적 요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이러한 분리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야 시민권이 부여되는 정치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분리의 논리’는 자본의 실재적인 발생과정이며,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은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행사를 게 입각하고 있다.(노동이 자신의 수단에서 분리)
정치경제학 비판은 경제학에 대한 만큼 정치학에 대한 비판이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코뮤니즘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대한, 인간해방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예견이다
코뮤니즘은 자본 및 그 국가에 대한 실천적인 비판이다
자유롭다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는 ‘공통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코뮤니즘은 노동계급의 실재적 운동이다
인간해방? 해방수단이 가장 결정적이다
수단과 목적이 대립? ‘혁명적 당’이란 생각은 형용 모순이다!
코뮤니즘은 사회적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추상으로부터 노동이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위기는 지도력의 위기이다’-트로츠키
***코뮤니즘이 제기하는 이슈? 권력을 잡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와 시초축적
노동수단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가 [자본주의] 생산의 토대이다
‘상품’은 교환되고 ‘화폐’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앞당긴다
나는 자본의 최초의 폭력이 평등, 해방, 자유, 공리 등의 ‘문명화된’ 형태들을 형성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부르주아 ‘평등’의 실재적인 내용을 신비화한다.
인간해방의 이념이 아무리 단순해도, 그 목적과 수단을 고려한다면 그 실천은 가장 어렵고 불확실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인간해방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는 황금 열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완전고용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번영하는 걸 보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거 너무 빨리 성장한다고 말하며 우리가 가난해졌으면 합니다…”-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시아 전직 총리, 1997년 말레시아 금융위기 근본원인 평가
코뮤니즘은 ‘communis’를 의미, 이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다. 여기에서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기여하며,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받는다.
공정임금? 공정임금과 공정한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는 자본주의의 바로 그 ‘공정성’이라는 조건들에서 추상된다.
오늘날 미국에 나타나고 있는 출처분명의 많은 자본은 어제 영국에서 아동들의 피가 자본으로 전환한 것이다
전복은 단순한 체제 순응적 반란으로서의 혁명을 추구하는 대안적 엘리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노동을 지도하는 것이지, 노동의 자기해방이 아니다. 전복은 전면적인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진보는 재난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을 자유롭게 만든 더 거대한 노동생산성이 노동을 과잉인구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적 계급이, 처벌도 받지 않으면서, 다른 계급을 굶주리고 할 수 있는 자유란 공허한 기만이다
#이상주의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상상력 없는 이성은 괴물을 창조한다. 이성 없는 상상력은 불필요한 것을 창조한다. 상상력과 결합한 이성은 코뮤니즘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20세기는 비참한 세기였다? 20세기는 도그마들로, 우리로 하여금 차례차례 시간, 고통, 그리고 많은 불의들의 대가를 치르게 한 도그마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적 가치들은 추상적 정체성의 부과를 통해 파괴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유롭다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향이 자본의 세계시장 사회가 정리되는 비인간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출발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다. 이상주의는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혁명은 부정의 과정이다
혁명은 다시 한 번 하나의 물음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문제는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의 선량한 공동체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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