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얼 쇼리스 .p426
Riches for the poor-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
클레멘트 코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수업
인문학? ‘자유’와 ‘질서’라고 하는 양 극단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제3의 사고방식’, ‘자율’이라는 중용적 사고방식이 가능할 수 있다!
무력force과 힘power
‘우리는 가난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그는 정치인이자 인문주의자였다, 인문학과 정치의 밀접한 관계 그 자체 증명에 노력,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하는 사람’이었다!
인문학과 공적 삶(public life)
인문학이라는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평탄한 삶은 인간에게 적합한 삶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철학자는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칸트는, 정언명령?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력가의 명령대로 행동했다!
칸트는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있었고,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 세속적인, 즉 ‘세상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는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상아탑 속의 편안한 안주? 예술을 위한 예술!
#클레멘트 코스 교육과정 운영의 기본 원칙? 자치(나는 이것이 인류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등교육기관? ‘교육하는 곳’에서 ‘준비시키는 곳’으로 전락?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저 잘 사는 사람들의 일일 뿐이었다!
록펠러 가문? 그들이 받는 학교교육은 더 복잡하고, 덜 반복적인 일을 하는 데 적합한 교육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머리를 덜 써도 되는 단순한 작업을 위한 훈련을 받게 된다
국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될 때마다 쓰는 방법은 항상 똑같았다.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훈련’ 시키는 방식의 복지정책? 가난한 사람들이란 일반인과는 뭔가 다른 존재,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란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훈련시켜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 부려 먹을 수 있다. 가난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시키면서 말이다.
“나는 여러분을 록펠러처럼 부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인문학을 공부하면, 여러분은 부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정치적 주체’로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이 된다!
클레멘트 코스의 탄생 배경 지식? 의도를 모르면 폄하될 수 있다(그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대학준비 과정이 아니다!)
#빈곤의 정의
미국에서 경험되는 빈곤이라는 것은 근대 사회의 산물이다
의식(儀式)이 지배하던 부족 공동체들에선 불평등보다는 평등이 원칙이었다
사냥과 채집 대신 농업과 축산 정착? 소유의 개념 발달했고, 불평등은 더욱 두드러졌다!
의식이 무너지자 경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게임의 법칙? 게임에 본래 내재된 ‘평등의 손실’에 주목해야 한다
게임 참가자들은 ‘자연’ 안에서 동등한 존재로 출발했는데도 ‘사회’ 안에서는 결코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결말이 난다!
플레오넥시아pleonexia, ‘갈망, 금전욕, 탐욕’
현대 사회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현대 사회에서 게임은 결코 무승부로 끝나지 않는다
평등의 개념? 결과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감춤으로써 승자에게는 자부심을, 패자에게는 수치심을 안겨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중산층이란 패자와 승자를 구별해내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도 게임의 비능률성만을 의미할 뿐이다? 중산층은 부자나 빈민들과 연계를 맺음으로써 이른바 능률의 환영을 창조해낸다!
게임을 위해선 불평등이라는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의 정의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백분율의 신기루? 그것은 덧없는 망상일 뿐(통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난의 의미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세계는 경주만큼이나 상대적이며, 상대빈곤은 견디기가 어렵다!)
양이 질로 변한다(마르크스의 개념)
정치 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는 24번가 사람들? 아등바등 살아가면서 절대빈곤이란 외국에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경제가 지배 규칙이 된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들은 정치적 규칙보다는 무력의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빈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세계’이다.(무력과 힘)
타고난 능력에선 부자 아이들과 동등하거나 때론 더 뛰어날 수도 있는 가난한 아이들이지만 테니스 배우기에선 뒤떨어진다. 현대 사회의 게임에서 이제 그들은 패배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정치? 빈민들의 삶에서 결여되어 있는 정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이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의 예술, 정치의 문제로 수렴된다!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학생들의 정치적 삶을 출발점으로 삼았다(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프랑스식 모델?)
소크라테스는 글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위해 ‘정치적 삶’을 예로 들었다. 그는 생각과 행동을 융합해 정치를 탄생시킨 것이다. 정치는 언제나 대화였다!
정치적 삶? 행동하는 삶! 정치적 삶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으로만 존재, 이것이 바로 정치, 또는 중용이다
원시 사회에서 의식은 정치적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필요가 지배하는 삶? 빈곤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무력의 법칙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힘은 참다운 실천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런 실천은 정치를 수행함으로써 가능하다
#빈곤의 황금 시대
마약을 지닌 낯선 남자와의 일주일간 모텔 파티?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자기 본래의 생활로 돌어갔어요. 나한테 이런 중독 증세를 넘겨주고서 말이죠.”
아메리칸 드림? 경제적 신분 상승 이야기를 빼면 미국의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모든 역사를 통해 부자들은 신화를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빈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신에 손에 달려 있기 땨문에, 빈민은 자신들의 운명을 체념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무력은 논쟁과 달라서 모든 대화를 중지시켜 버린다
무력force은 압제자들이, 폭력violence은 억압당한 사람들이 사용한다
폭력은 무력이 권위를 갖도록 하는 물리력이다
무력은 대상자의 인간성을 파괴함으로써 강해진다. 그러나 힘을 행사할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함께함으로써 그 힘이 커진다는 특성이 있다(힘은 원, 무력은 화살)
“무력은 강자의 우세 아래 약자가 된 사람들이 사용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약하게 만든 강자들이 사용한다.”-파울루 프레이리, [억압받는 이들의 교육]
희망? 탈출의 희망을 잃은 사냥감은 운명 앞에 굴복한다!
#아노미의 문제? 무력의 포위 속에서는 사람들이 가난과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법의 부재, 자제와 규범의 부재
자살을 촉진시키는 아노미 상태는 상대적 빈곤 상태에서 발생하며,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빈곤의 상대적 본질을 매일 안방까지 실어 나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진짜로 실패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그런 물건을 구입할 여력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교도소는 무력의 포위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당히 잘 다듬어진 축소 모형이다(담장은 무력을 대표한다!)
감옥에는 적당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도소 안에서 공적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무력의 포위망 안에서 겪는 고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행동하는 삶’의 모형이 존재하지 않는다.(군대 역시!)
출소? 그곳에서 경험은 다시 포위망안에 가둬버리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그릇된 생각
노동윤리? 현대 사회의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 평등한 상태에서 추락한 사람들의 행동을 개조하고,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차를 넓히려 하고 있다(누구를 위한 노동윤리?)
노동은 가난, 특히 여러 세대에 걸친 가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노동이 갖는 문제점은 일 자체뿐만 아니라 노동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데서부터 생기기 시작한다(실상은 착취의 요소를 감추고 있는 ‘노동’)
권한과 능력의 부여? 가난한 사람들은 그 말 속에 담겨 있눈 속임수를 아직 간파하지 못했다? ‘적응’에 가까운 것으로 권력power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행동하는 삶: 힘은 저장될 수 없다(한나 아렌트). 행동이 그치는 순간 힘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문화를 넘어서
미합중국 헌법기안자들? 문화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정치에 있었다!
미국인들은 잃어버린 문화로 만들어진 가면, 상상할 스 없는 가치와 되돌릴 수 없는 세월로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자신들을 스스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선조들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자신이 선조가 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현대 사회는 불평등의 개념 위에 세워졌다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정은 매사에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반면,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경우는 한결같이 정치적이었다.
#감옥에서 클레멘트 코스의 영감을 얻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교도소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사회의 맨 끝자락? 오히려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정신적 삶은 스스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정치만이 ‘무력의 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근본적인 해결책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계획이란 그저 빼앗거나 윽박지르는 것뿐이다.
정신적 삶? 인문학 의미!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해방시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노예 후손인 미국 흑인들이 대물림되는 빈곤을 떨치고 일어나는 일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신 여러분이 더 많이 생각하도록,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을 쓰는 일이 열중하도록 만들것입니다…”
예술을 공부하는 목적은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은 이 물리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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