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p256
자본론? 마르크스의 통찰력!
내게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속한 자본주의 경제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깊이 고찰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부정한다든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교환’이라는 데 내재하는 근원적인 패러독스에 의해 잉태된 것으로 오히려 인간의 조건과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종교적이라든가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가 종교적이며, 공산주의는 단지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에서 현실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자본론은 세계적인 계급분해와 신용공황 속에서 오히려 일찍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에 타당하고 절실히 와닿는 책이 되었다!
상인자본은 가치체계의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
상업자본은 공간적인 차이, 산업자본은 시간적 차이화에 의해 또는 공간적인 차이를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써 얻는다
자본이란 잉여가치를 어디에서 얻든지 구애받지 않는다. ‘가격’과 달리 ‘가치’는 복수의 다른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
“상품은 그 자신, 종교적,정치적,국민적,언어들은 모든 장벽을 초월한다. 상품의 일반적인 말은 가격이며, 그 공통의 본질은 화폐이다.”-<정치경제학 비판>
그는 이윤의 원천을 토지의 자연력에서 구했다(부의 원천은 자연의 생산력)
산업자본은 그 자신이 제작할 수 없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력과 자연환경이다.
확실히 환경오염은 자본경제의 ‘재생산’에 커다란 질곡이다
자본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 생산, 곧 차이•차이화이지 생산의 내용이 아니다!
가치생산적? 무엇을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자본제경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곧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부딪치는 문제는 언제나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뿐이다”-마르크스
마르크스를 알고자 하면 을 숙독하면 된다(제대로 읽어라!)
그의 참된 내적 구조는 그가 체계를 의식적으로 서술한 형식과는 전혀 다르다!(텍스트를 넘어서는 의미)
단순한 상품의 기괴함? 마르크스는 상품에서 시작한다. ‘자명하고 평범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전체를 푸는 열쇠? 여기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기성 경제학체계는 평범한 상품을 기괴한 것으로 보는 눈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상품 또는 가치형태를 발견한 것이다(새로운 시선)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주요한 과제는 가치형태에 대한 현미경적인 해부에 의해 경제학이나 화폐경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편견’을 타도하는 데 있다.
상품의 기괴함? 상품이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한 상품의 기괴함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품? 인간의 욕망!
화폐? 화폐형태는 가치가 가치형태, 달리 말해서 상이한 사용가치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결코 고정적인 관계를 취하지 않는다
‘가치’라는 것은 없고, ‘상이한’ 사용가치의 관계가, 더 정확히 말하면 ‘차이’의 유희가 근저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중심 없는 관계의 체제’를 찾아냈다고 구조주의자처럼 만족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의심해야 할 것은 ‘체계’이고 ‘구조’이다.
그들의 상이한 노동을 인간노동으로서 상호 등치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화폐형태에 의해 소거되어 버린 ‘가치형태’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상형문자인 것이다. 우리의 ‘의식’에는 어느새 그것은 보이지 않고 그 결과만 비친다(화폐=음성문자?!)
고소공포증의 원인은 높은 곳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의식’ 안에 은폐되어 버린 결과에 불과하다!
니체는 “모든 개념은 동등하지 않은 것을 등치시킴으로써 발생한다”고 했다
“교환은 동등성 없이 있을 수 없고 동등성은 양적 비교의 가능성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난관에 봉착하여 더 이상의 가치형태의 분석을 포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성은, 바로 그가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일종의 동일성의 관계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빛나고 있다
‘인간의 평등’은 화폐경제의 산물이지만, ‘화폐’의 수수께끼는 의문시되지 않았다. 그것을 묻는 일은 화폐라는 ‘유일자'(神)의 근거를 묻는 일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이른바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사상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가 그런 종류의 사회주의적 이상가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가치’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폐란 문자다! 교환=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화폐=음성문자의 산물이고, 이 원근법의 도착에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상인자본이 있다
한 상품의 ‘가치’는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과의 가치관계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같은 상품이라도 어떤 지역에서는 싼데 다른 지역에서는 비싼 것은 각각의 지역에서 다른 상품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할 뿐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화폐형태에 의해 사라져 버리면 마치 그 상품에 독자적으로 내재하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 관계의 차이가 화폐에 의해 양적인 차이로 나타난다
생산과정 자체는 가치와 관계가 없으며, 가치나 잉여가치는 항상 교환과정에서만 주어진다
교환(매매)은 적어도 교환자에게는 등가교환으로 보여야만 한다
세계화폐, 세계종교? 차이성을 완전하게 은폐시킨다!
수(數)? 질적 차이를 추상화하여 그것들을 동일성 위에 놓을 때 수가 나타난다. 그러무로 수 역시 가치형태를 은폐한다!
결국 수량적인 표현은 가치형태를 은폐함으로써 성립한다!
논리학은 현실세계에서 아무 것도 대응시킬 것이 없다!
산업자본은 상품경제의 확대, 세계시장의 성립 속에서만 성립한다!
잉여가치는 늘 서로 다른 가치체계의 차액에서 생긴다
열쇠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있다!
자본제생산의 신비성은 의식적으로는 뚜렷이 ‘등가교환’으로 보이면서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신비성의 근원은 상품의 가치가 관계의 체계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나 잉여가치가 유통과정과 동시에 생산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백 개의 자립적인 노동력의 가치는 지불하지만 백 사람의 결합노동력의 가치는 지불하지 않는다. 독립된 인격으로서 노동자들은 동일한 자본과 관계를 맺지만 상호관계는 맺지 않는 개별적인 사람이다.”
등가교환? 자본은 그 차액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은 세계를 문명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존속하기 위해 기술혁신을 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필요 때문이 아니라 ‘가치’에 의한 전도 때문에 일어난다
자본제사회에 이르는 ‘발전’에는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다? ‘발전’으로 보이는 것은 화폐형태라는 전도 위에 누적된 전도인데, 화폐형태 자체가 그것을 덮어 숨기고 있다!
공황은 화폐형태가 은폐하고 있던 가치형태-상형문자-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상품을 내버려 두고 만다. 상품이란 상품형태일 따름이며, 물건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물건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철학자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온 데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대립’은 애당초 없으며 단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립은 차이의 동일화에 의해 생긴다!
‘언어’의 문제는 해석?
‘현상과 본질’의 이분법? 마르크스가 가치형태론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사유형태에서는 이미 근원적인 ‘관계'(차이)가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은폐된 근원적인 차이를 발견하는 것, 또 어떻게 해서 그것이 은폐되는지를 하는 것이 의 과제이다
상품은 각각 내면적인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들은 화폐형태가 부여한 형이상학일 뿐이다. 상품의 근저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근저 자체가 부재하며, 거기에 있는 것은 시니피앙의 유희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언어이다. 우리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유하게 한다는 것, 그것이 <독일 이데올로기>에 담겨 있는 마르크스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 인식은 더 철저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정확한 번역?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의식에는 언제나 형성된 의미가 반영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변화’라는 무관심한 사태에는 늘 폭력적인 광경이 숨어 있다
현대의 역사가가 쓴 작품에는 ‘인간’이 빠져 있다? [사기]가 보여준 독특한 리얼리티를 도저히 현대의 역사가나 소설가가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사기>는 인간의 역사!)
개인은 병립하는 관계와 관계의 체계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인은 개인인 동시에 ‘가면’. 이른바 기호로서 나타나고, 그 기호의 ‘의미’는 기호의 관계체제 속에서만 부여된다. 그리고 그 체계에는 ‘중심이 없다.’
<사기>의 ‘인간’ 분류표? 차이와 동일성에 의해 긴밀하게 조직된 기호체계이다!
역사가의 권력은 ‘사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는 사실의 기억도 기록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쓰는 일 자체를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미를 규정한다는 역설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증기기관이 과학에 빚진 것보다도 과학이 증기기관에 빚진 것이 크다.”-헨더슨
“열이 동력원이 되다보니 고전역학은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다.”-길리스피
**틀에 박힌 자가중독증상? 받아들이는 만큼 내보내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사상가의 생리다!
마르크스는 반서구적인 사상가이지만 오떤 의미에서는 더 철저한 서구의 ‘철학자’였다!
서구의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플라톤의 텍스트는 사실 반플라톤주의 자체의 보고()이기도 하다!
문학은 애매하고 철학은 엄밀하다? 철학도 결국은 문학, 곧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이 물질도 관념도 아니고 이른바 언어다!
언어학자에게는 언어에 대한 놀라움이 없고 경제학자에게는 상품에 대한 놀라움이 없다. 그것들의 ‘마력’ 앞에 멈춰 선 적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용가치란 경제학의 고찰범위에서 제외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애초에 자본주의는 ‘주의’가 아니다. 요컨대 사람이 임의로 선택한다든가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곧 규칙을 공유하지 않은 타자와의 교환=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에 기초하고 있는 어떤 불가피한 ‘현실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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