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첩기행1 예의 길을 가다. 김병종. p 345
잡혀간 도공은 거대한 비석이 세워지고 이름이 빛나도 이 땅에 남아 있는 도공은 무덤 하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의 세기? 어느 날 홀연히 오고 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문화나 예술은 세월과 더불어 그 나라 사람의 가슴속에서 피고 지는 꽃일 뿐이다.
(바람몰이식 문화일수록) 자생적, 창의적 문화를 준비하지 못한 민족에게 문화의 세기는 오히려 문화의 종속을 부를 수밖에 없다.
겉멋이라고? 물론 ‘겉멋이고 말고’다. 사실 나는 겉멋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차 한 잔도 그에 걸맞은 음악 없이는 마시기 싫다.
보고 듣고 입고 먹는 것에 까탈을 부리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네 삶에서 이런 종류의 겉멋을 모조리 걷어낸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런 겉멋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산 좋고 물 좋은 이 아름다운 풍광의 도시 서울에 살면서도 철근과 시멘트 구조물 속에 갇혀 지내는 것 아닌가.
예술학교 접장질 20여 성상, 가르치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바로 엊그제 유명을 달리한 선배 예술가의 행적마저도 희미하다는 사실이었다. 선생 초년시절만 해도 대학원생들 데리고 전국 여기저기를 꽤나 헤매고 다녔지만,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이 나라 예인들의 뒷자리는 황무했다. 석양녘 쓰러져가는 오두막 생가나마 발견하게 된 날은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근•현대 우리 예술가의 뒷자리가 이토록 쓸쓸한 것을 볼 때마다 우울했다. 내가 돌아다니며 눈으로 보고 손길로 쓰다듬었던 세계 여러 예술가들의 유적지를 떠올릴 때마다 우울은 분노로 변하곤 했다. 그랬다. 나는 그렇게 20년 세월을 남모르게 분노의 세월을 살았다.
이 땅의 예는 죽지 않았다.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저 경제와 과학 만능의 고장난 자동차에 타고 있는 당신에게 이제 그만 내리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삶의 의미와 빛을 던져주는 일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런 무한질주의 자동차를 타는 일이 아니다.
이제 그만 산천초목을 두루 구경하며 갈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의 마차로 바꾸어 타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세상 밝히는 일, 사는 일의 행복은 때로 의외의 곳에서 올 수 있다.
화첩기행? 인생의 외도! 삶의 지평도 넓어지고 배우는 바도 많았다(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 교만인우交萬人友)
#01 이난영과 목포
“살아 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 하늘 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 싣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남도 한의 엘러지 가락이 판소리 아닌 대중 가요로 절묘하게 형상화된 경우다.
#02 진도소리와 진도
‘징하게 이쁜 섬’ 진도, 음기가 세어 여자가 세고 예가 센 땅. 그 섬에서는 부는 바람, 구르는 돌에도 예기가 묻어 있다.
동•서편제나 판소리 열두 마당으로 가를 수 없이 분방해 판소리의 사문난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진도 소리는 일과 노래, 한과 해학이 하나 된 절묘한 노동요다.
풍수에는 어둡지만, 예향이라고 불리는 곳일수록 음기가 센 땅임을 느끼게 된다. 예향 중의 예향 진도, 여자가 세고 예가 세다.
단가와 노동요 그리고 잡가가 성했던 이유? 생활음악!
슬픈 노래라 할지라도 부르는 중에 슬픔의 고개를 넘게 하는 힘이 있다.
“홍주 없이 진도창 없다”
#03 강도근과 남원
“저렇게 사납고 공격적인 ‘사랑노래’는 생전 처음이네요.”
“남원 가서 풍류 자랑 말라”
남원은 청각 못지 않게 미각 문화가 발달한 곳
승사교 남단에 있는 남원시 국악연수원
지리산 산악지대(남원, 구례 등)에 동편제, 평야지역(나주, 해남, 보성 등)에 서편제가 발달!
#04 서정주와 고창
***사물을 시혼으로 살려내는 영매!
미당 서정주의 시는 선운사 동백꽃만큼이나 붉고 악마적이다. 무(당)기가 흐르는 이 조선의 보들레르는 고창의 이름 없는 들꽃과 씨누대밭길, 하다못해 질마재의 황토까지 소름끼칠 만큼 아름다운 시어로 그려낸다. 이 시의 장인은 사물을 시혼으로 살려내는 영매다. 고창이 미당을 낳았는가, 미당이 고창을 낳았는가.
선운사 동백꽃에 미당 시가 타오르네
‘요즘 소식’
질마재의 투명한 햇살과 붉은 흙 대신 오직 공해로 숨막히게 탁해진 하늘과 쉼없는 자동차 소음뿐. 문득 시인이 한숨처럼 쓴 시 몇 줄이 떠오른다.
#05 허소치와 해남
운림산방!
저 현란한 속도로 질주하는 문명의 자동차에서 내려 ‘운림산방’에 걸어 들어가면 이 남화의 옛 도사 허소치의 정신이 오롯이 다가온다.
“관학에 가더니 영 못쓰게 되버렸구나. 애초에 의재 선생이나 남농 선생 문하로 갔어야 했는데…”
“원래 남화는 도인들이 하던 것 아닙니까?”
두륜산 일지암, 초여름의 일지암은 그대로 선계에 든 느낌을 갖게 한다!
근세에 남화의 씨를 뿌린 초의 선사는 ‘차와 선이 한 맛(차선일미)’이라 했지만, 거기에 ‘화와 경은 하나(화경일체)’라고 덧붙이고 싶을 망치 남도의 풍광과 토양은 그대로 남화의 탯줄이 되고 있다.
동양 미술은 그 양식이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06 이매창과 부안
설움 속에서도 봄볕에 터지는 꽃망울처럼 문학적 재능이 만개했던 이매창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이라 했듯 시문학, 특히 가사와 한시에 능했지만 그녀는 서러운 기생의 신분.
부안에 가거든, 격포의 일몰과 내소사, 월명암의 달빛만 보고 오지 말기를.
부탁하노니, 찾는 이 하나 없고 울어줄 이 하나 없는 두 요인의 무덤에 꽃 한 송이씩 바쳐주기를. 푸르른 나이에 외롭게 떠난 시인 이매창과 명창 이중선(1901?~1932)의 묘소는 서로 지척이니 한 번 들러 혼백이나마 위로해주기를.
한때 매창의 연인이었던 허균
유난히 경승지 많아 ‘생거부안’이라 했지만 이 미완의 혁명지에는 역사에 서린 한 또한 많았다.
촌은 유희경, 도골선풍의 그와 시로 화답하던 밤, 그녀는 머리를 풀고 큰 절을 올린다.
“명마는 백락을 만나기 전에는 굴복할 줄 모른다 합니다.”
개암사는 엉뚱하게도 그 절의 아름다움보다도 ‘개엄죽염’으로 더 알려진 절이다.
이곳에서, 속도는…악이다.
변산
#07윤선도와 보길도
‘지국총 지국총…’의 후렴구로 떠오르는 보길도
두 얼굴의 섬? “허벌나게 이쁜 섬”이지만 성깔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
사실 조선조의 예술사는 어떤 면에서 배소(유배지)의 예술사였다. 정치적 박해와 소외의 아픔 속에 칼바람을 맞으며 이루어낸 위대한 아웃사이더들의 예술사였다. 송강과 다산과 추사의 예술은 한결같이 쓰라린 인고의 세월 속에 피어난 꽃들이었다.
러브호텔? “아따 눈감아 주시오. 사랑없는 세상에 사랑이사 많을수록 좋지”!
하긴 어지러워진 것이 어찌 이곳 풍경뿐이겠는가. 나 홀로 비밀스럽게 찾아다니던 곳들마다 이제는 옛 모습이 아니다.
시•가•무가 하나!
#08 운주사와 화순
무채색의 들절, ‘못생겨서 더 정다운’ 돌부처들은 법당이 아닌 들판과 산자락 여기저기에 누워 있거나 기대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미완의 혁명 설화를 안고 있는 운주사 석불들. 논두렁에서라도 만날 듯한 그 순후한 모습들 위로 오늘도 천년의 바람과 구름이 지나간다.
화순삼복? 인삼, 동복천의 ‘복천어’, 토종꿀 ‘복청’
물과 돌의 고장! 물은 산수의 피요, 돌은 산수의 뼈다!
#09 임방울과 광산
타고난 미성으로 일세를 풍미한 명창.
쑥대머리의 가객
그에게는 동편제, 서편제가 따로 없었다.
오직 소릿줄 하나만 부여잡고 살았던 한평생이었지만, 가고 남은 그 뒷자리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
낡은 소리북 하나로 남은 명창 40년!
광산문화원의 빈 사무실 낡은 캐비넷 위, 헌 신문지 더미와 박스들 속에서. 한 시대의 심금을 울렸던 임방울의 북은 주인 떠난 뒤 오랜 세월 짐짝처럼 그렇게 놓여 있었다.
또 한 번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던 것이다. 우리 예술의 현주소란 고작 이런 모습이란 말인가!
2킬로미터도 넘었던 장엄한 장례 행렬? 그러나 속절없다. 한 시대의 별은 그토록 화려하게 떠났건만 불과 40년이 지난 오늘은 천지간에 그 흔적마저 더듬을 길이 없다.
#10 이효석과 봉평마을
‘메밀꽃 필 무렵’의 그 토속적 탐미주의는 아직도 봉평장터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색채의 문학가. 그가 그려낸 세계는 한결같이 단내를 풀풀 풍길 만큼 원시적 생명력 충일한 ‘색깔 있는’ 것들이다.
고향 떠난 이효석의 묘소, 파주 이장
#11 김삿과과 영월
손으로 잡는 것마다, 토해 내는 숨결마다 시가 되었던 김삿갓. 시로 울고 시로 웃던 김삿갓.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방랑시인으로 삿갓 아래 얼굴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 영월에 가면 그 시인의 한 맺힌 혼백을 만날 수 있다.
김삿갓 난고선생 유적비(소백산 국립공원 노루목)
#12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은 결코 슬픔의 노래나 한의 가락만은 아니다. 질퍽한 해학이나 가락의 격한 높낮이도 없이 독백처럼 자기 심정을 노랫말로 털어넣은 그러한 순한 가락들이다.
정선의 옛이름 도원? “신선 사는 깊은 산 속 도원경 같다”
구절리, 오장폭포
#13 나운규와 서울
인생이 영화였고 영화가 인생이었던 나운규.
#14 김명순과 서울
이 나라 여성사에 기록될 만한 하나의 재능, 하나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희미한 안개 저편으로 스러져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김명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세속의 도시에서 신음처럼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부르짖었던 원망의 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단순하다. 그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땅에서라면 한 잔의 커피와 한 조각의 쿠키에도 행복해지는 존재다.
1920,30년대 유난히 많은 예술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그 시절 이 나라는 여성 예술가들에게 가혹했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제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김명순 시, ‘유언’중에서
‘우리는 언제…’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비단 김명순의 경우만이 아니라 이 나라 근•현대 선배 예술가들의 생애를 좇다가 맥이 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천지간에 어디 대고 물어볼 곳 하나 없었고 뒤져볼 자료 하나 없기 다반사였던 것이다. 김명순의 경우는 신문기자로서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음에도 그 생애의 흔적이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5 정지용과 옥천
가슴에 묻어둔 첫사랑은 다시 만나려 애쓰지 말 것. 사랑만이 아니다. 그리움의 장소도 가급적 가슴에만 담아둘 것.
아무리 찾아가고 찾아가 보아도 우리네 그 옛 고향은 이미 현실의 지도 위에는 없다!
집 앞 실개천은…재앙이다. 시멘트로 뒤덮여 있다. 넓은 벌판도, 얼룩백이 황소의 금빛 울음도 없다…그 옥천은 이제 아니다.
#16 나혜석과 수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독립운동가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 유럽여행, 식민지 조선 여성으로서는 선택받은 삶을 산 신데렐라였으나, 가부장제적 사회구조의 질곡 속에 이지러진 그녀의 삶은 끝내 황폐해지고 만다.
‘눈부신 나이로구나’, 이응로 화백의 부인 박인경 여사와의 이화여고 졸업반 때 만남
문득 나혜석이나 이중섭 같은 파란의 생을 디딤돌로 하여 나 같은 작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투성이로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예의 길을 닦어놓은 것이다. 그 대로 위를 나 같은 시러베는 무임승차하여 굴러온 것이다. 부디 ‘예술가입네’하고 턱을 쳐들고 다니며 까불지 말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의 예원의 꽃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
#17 이건창과 강화
#18 김동리와 하동
저문 화개장터에 ‘역마’는 매어 있고
#19 별신굿 탈놀이와 안동 하회
‘물도리동’ 하회는 지형지세가 정중동의 예술공간이자 ‘움직이는 산수화’, 민속과 예의 보고이기도 하다.
유림은 모른다네 한풀이 탈춤
탈춤! 7,80년대 대학 축제 단골 메뉴였다. 억눌리고 은폐된 현실을 풍자하고 꼬집기에 탈춤만한 소재가 없었던 것. 특히 오랜 군사독재하에서 익명성과 가면성은 현실에 대한 은유적인 혹은 노골적인 발언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20 이인성과 대구
한국의 고갱, 세잔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 대원은 뛰쳐나간다…
“누, 누구요?”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찟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최인호 소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1970년대 초반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충격과 분노는 컸다.
이인성의 최후는 이 땅에서 예술한다는 것이 자리매김이 어떠했는지를 소스라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9•28 수복 후 서울에서 한 경찰과 사소한 시비가 화근, 39세로 아까운 최후를 맞았다!
글쓴이는 묻는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 예술가를 멸시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로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우리는 거의 늘 그랬다. 모짜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눈으로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것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서양화로 조선의 ‘향토색’을 담으려 노력했던 이인성의 흔적은 대구에서 찾을 길이 없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이인성 그림 속의 붉은빛 구도 안에 들어와서 있건만, 천지간에 화가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21 남인수와 진주
‘화첩기행-이난영과 목표’ 편 나가고 며칠 후, 불쑥 전화 한통!
“목포에 이난영이 있다면 진주에는 남인수가 있습니다.”
“그 어른은 노래로 애국하신 분입니다.”
“선생의 노래는 민족의 수난과 격동기마다 서민들에게 삶의 고개를 넘는 힘이 되어주었지요.”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그러나 그의 웅변조에도 불구하고…내 싸가지없는 이분적 사고 속에서 남인수는 여전히 흘러간 대중 연예인일 뿐이었다.
“그렇게만 보시면 안 됩니다.”
“대체 고급 예술은 뭐고 대중 예술은 뭡니까? 선생이 하는 일은 고급 예술인가요?”
선생이 하는 일은…, 불의의 일격에 나는 명치가 막혔다. 그렇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급수가 아니다. 진실이다.
“사람들은 대중 예술을 사랑하고 나중에는 그것이 대중 예술이었다고 해서 버립니다. 우스운 일입니다. 서글픈 일이지요.” 신해성의 말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한 수 위?!
“죄라면 시대와 땅을 잘못 골라 태어난 게 죄일 뿐입니다.”
#22 박세환과 경주
80년 역사의 국내 최고 서커스단 ‘동춘’의 박세환 단장
#23 문장원과 동래
소리가 전라도라면 춤은 경상도, 그 중에도 단연 ‘동래춤’
동래학춤
민속예술관에 문장원은 없었다
“지나고 보니 인생도 한바탕 춤 같은 것이었다.”
#24 암각화와 언양
선계와 같은 비경 속에 장엄한 ‘원시’가 현실로 만나지는 곳
대곡리와 천전리 암각화들은 세계적 가치를 지닌 선사유적지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문양들이 수 천 년을 뛰어넘어 현대미술처럼 다가온다.
‘현대’란, 결국 온갖 지적장난을 쳐보지만…가소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저 둔중하게 머리를 치는 묵직하면서도 신선한 감동 앞에 서면 현대미술은 왜 그리 작아지는 걸까. 참을 수 없는 현대미술의 가벼움과 역겨움이 이 원시미술 앞에 서면 한꺼번에 씻겨지는 것이다.
자연을 창조한 창조 원리가 담긴 아르케타입(원형)의 원시예술세계?!
#25 이중섭과 제주
생전의 반 고흐가 그랬듯 이중섭의 생애 역시 철저하게 불행했다.
예술가와 예술의 역사는 묘하다. 묘하다 못해 짓궂고, 짖궂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동반자이면서 적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양자는 철저하게 채움과 비움의 동어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생전에 채워 있는 예술가는 사후에 비워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 평가와 그 명예와 그 부요함마저도.
재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내가 물었다. “도대체 이중섭이 왜 그렇게 위대한가요?”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말하면서 나는 ‘이런 상투적인…’하고 생각했다.
그 위대성은 ‘생애와 작품’을 뭉뚱그려 위대한 것이며, 그 양자를 분리해 생각할 수도 없는 것?!
중섭은 드물게 순수하고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이 나라의 가난한 어린 아이들을 사랑했고, 게와 닭과 물고기와 나무를 사랑했다.
#26 김정희와 제주
인구에 회자되는 추사체, 거센 해풍에 뼈대를 드러낸 제주의 현무암처럼 힘 있고 거칠면서도 지극한 아름다움을 이룬 그 글씨는 좌절과 소외의 배소(유배)에 핀 ‘검은 꽃’이었다.
또한 겨울 당한 이후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소회를 피력했던 ‘세한도’는 그림으로 쓴 독백이요, 일기였다.
흙 냄새 풀풀 나는 바닷가 토방!
그러나 그 토방에서 동양적 ‘미니멀’의 초현대풍 추사체가 완성되고 불후의 명작 ‘세한도’가 그려진다.
달콤한 이국적 신혼 여행지 제주?
민란의 피바람과 그 수 많은 유배지의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음을 아는 자 몇이나 될까?
예술의 성취란 인생의 이러한 혹독함 뒤에야 비로소 그 대가로 오는 걸까.
쓰라린 유배기간 중의 위대한 걸작, 세한도와 칼바람으로 거칠어진 현무암을 닮음 추사체!
세한도,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렸으되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닌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림이나 글씨에 혼백이 붙어다닌다고 믿는 사람이다. 명품일수록 그렇다. 그것은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서예가 손재형의 손으로 일본인 후지스카에서 되찾은 세한도!
간송 전형필
세한도, 노자의 “다섯 색이 눈을 멀게 한다”는 지적처럼 추사는 이 그림에서 선미(禪美)짙은 먹선 몇 개로 열 가지 색을 이겨내며 아름다움의 본질에 이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