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p233
‘부디 이 책을 강압적인 교육의 방편으로 삼지는 말아달라’
“왜 나만? 당신이 하면 안 돼?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만은 당신이 이야기 좀 해줘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엄청난 무게로 와닿기 마련이다. 크건 작건 간에 어쨌든 즐거움에서 시작된 일이라면 소중히 지켜줄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켜주지 못했다.
“너 계속 그러면, 오늘 밤엔 아무 이야기도 안 해줄 테다!”
으름장대로 실행되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맙소사…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같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학교라는 대안이 생겼다.
학교는 아이의 미래를 떠맡았다.
‘마망maman’, 엄마! 아이는 방금 마법의 돌을 발견한 것이다.
누구라도 이 새로운 눈뜸이 가져다주는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지적 항해의 첫발!)
***모든 독서에는 의당 읽기의 즐거움이 자리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연금술사의 기쁨이다!
요컨대 독서도 직립 보행이나 언어 구사 못지않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진대 말이다
그러나 아이가 맨 먼저 배우는 것은 책읽기가 아니라, 책 읽는 시늉일 뿐이다(자기과시? 어른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스스로 안도감을 찾으려는 행동!)
담임선생님에게 비춰진 우리는 ‘열린 사고’를 지닌, 더 할 나위 없는 자상한 부모였다.
“방금 전에 읽어놓고도 몰라? 이게 무슨 뜻이냐고?”
“아니 넌 공부를 하는 거니, 마는 거니!”
“다시 읽어봐.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란 말이야!”
“우는 시늉 좀 하지 마!”
게다가 이런 식의 다그침은 하루 중 가장 좋지 않은 순간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퇴근 후, 아이가 지쳐 우리가 진이 다 빠져 있을 때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우리는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기보다는 자못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린 정말로 걱정스러웠다. 어찌나 걱정스러운지 시도 때도 없이 내 아이를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시시콜콜 비교하곤 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그런데 아이는 지금, 제 방 또는 교실에 갇혀서, 책 속의 한 줄 혹은 한 단어에서 도무지 헤어나질 못한다.
신에 가깝던 그 무소불위의 인물들이 창졸간에 점점이 버스러져 한낱 인쇄 기호들로 짜부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책이라는 물건이 된 거라면, 변신 치고는 별 희한한 변신도 다 있다! 마법이 반대로 걸린 것이다. 아이도 아이의 영웅등도 다 함께 말없는 어마어마한 두께 속에 갇혀버린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왕자는 어떻게 되었지? 대답해봐!”
우리는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텔레비전 볼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마!”
그렇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텔레비전이 보상이라는 지위로 격상, 당연히 독서는 억지로 해야 할 고역으로 전락할 수밖에 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에게서 나온… 우리 스스로의 발상이었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읽기를 익히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만 열을 올린다…참 딱한 노릇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의 흥미! 이것만이 아이를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유일한 동인이다.
‘조급하게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얻는 길이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원천 봉쇄하는 우매한 교육적 발상들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심하다는 아버지가 오히려 제대로 된 교육을, 훌륭하다는 교사가 오히려 형편없는 교육 방침을 실천하고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아니 또 실제로도 그렇다.(무위의 교육!!!!)
“아이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독자입니다.”
아이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주고, 기꺼이 저녁 시간을 내어주고,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즐거운 의무란 무상성을 전제로 한다!
즐거움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또 해줘!”,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반복은 아이를 안심시킨다. 반복은 친밀감을 보여주는 표시다. 늘 새롭게 보여주는 끝없는 사랑의 표시다.
***우리가 아이에게 시간 재촉을 포기하는 그 순간부터, 시간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
***이제 그만 책을 읽고 자야만 하는 이유를 강변하는 어른들만의 논리를 아이는 결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단 한가지 주제에 관해서만은 그 많은 학부모들 모두가 일제히 한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교리다!
독서는 모든 것을 떠맡는 적극적 행위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번연히 드러내고 있는데도, ‘읽어야 한다’라니…! 그것은 끝없이 반복될 뿐인 교육적인 경구의 공허한 후렴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지닌 문학적 소양은 전부 학교 밖에서 얻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학교의 역할은 요령과 기술의 습득, 주석 달기의 의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학교가 읽는 즐거움을 억압시킴으로써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통로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즐거움이란 어느 정도 무상성을 전제로 한다!
그야말로 학교 생활 전반이 하나같이 노동 시장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경쟁성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학교는 능력과 기능만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읽기를 배운다.
하지만 책읽기를 좋아하는 법은….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다름 아닌 우리가 처한 온갖 우연한 상황이다!
바르게 길들여진 독서는 우리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나로서는 공부만이 세상의 모든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최상의 치유책이었다. 1시간 동안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온갖 근심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리곤 했다.”-몽테스키외
독서가 과연 의사소통의 행위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 말이 없다!
책을 다 읽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책 속에 있다. 책은 거대한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우연으로 가득찬 일상사를 멀찍이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준다. 책을 읽었으되 우리는 말이 없다.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이다!
페로스 교수의 책읽어주기!! 수업의 놀라운 결과? “책을 읽고 싶은 욕구…그게 전부였죠.”!
패로스 교수는 지식을 주입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능 것을 내주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은 어떤 책에는 큰 소리로 읽어주셨다는 사실이에요!..그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책읽기를 가르쳐주신 분이지요!”
위대한 작품? 그럴수록 작품들은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청소년들에게 이른바 ‘논점 선취의 오류’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논쟁해야 할 것을 전제로 내세우는 오류!(우리들의 억견만 난무!)
#읽을거리를 주어라
그들은 이미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바로 이 학교라는 곳에서
바로 선생님 앞에서.
말 그대로 ‘좌초’를 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이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다만 읽어도 모를까 봐 지레 겁을 먹었던(그야말로 오랜 고질병과도 같은) 그 말을 못할 두려움으로 인해 줄곧 사춘기 아이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을 뿐이다.
선생은 둘을 이어주는 한낱 뚜쟁이였을 뿐이다. 이제 슬그머니 자리를 떠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언제 책을 읽을 것인가?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이 된 지하철
문제는 내가 책을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호기심을 우격다짐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일깨워주어야 한다!
이 교실로 앎의 길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책과 가까워지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나설 것이다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려면, 독서의 향연에 한 번 흠뻑 빠져보도록 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분은 책을 읽어주시기만 하신 건 아니에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단순한 이야기로)
#무엇을 어떻게 읽든…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1.책을 읽지 않을 권리
2.건너뛰며 읽을 권리
3.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책을 다시 읽을 권리
5.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8.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소리내서 읽을 권리
10.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책읽기란? 이야기에 대한 갈구, 허기를 태우는 일!
나는 왜 이렇게 속이 후련한지 모르겠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부모의 고민)
책읽기는 목적이나 실용을 떠난 무상의 행위일 뿐. 그러니 부모들이여, 마음을 비워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잔뜩 기대했다간 자칫 모든 것을 잃을 판이다!
‘읽다’는 ‘사랑하다’나 ‘꿈꾸다’처럼 명령문이 먹혀들지 않는다!
#독서지도의 구체적이고 손쉬운 실천 방안? 다 큰 아이에게도 ‘소리내어 크게’ 읽어주라! 그것이 책읽기에서 얻는 즐거움의 근원이며 시초였다!

“소설처럼 | ‘소리내어 크게’ 읽어줘라,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