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림의 경제학
나라 안팎은 떠들썩하게 했던 숭례문 소실 사건! 이를 개인의 인격장애로 치부하고 철저한 처벌과 복원, 철저한 관리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 단순한 대증요법은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순간을 모면한 꼴이란 날카로운 지적이 정곡을 찌른다. 서해 기름누출 사건, 금융위기의 시발점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역시 마찬가지다. 예(禮)의 붕괴가 현실 사회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들이다. 돈이 아닌 행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살림의 경제학‘을 제시한다.
돈의 패러다임은 아침부터 와서 오래 일한 자에게는 많은 돈을 주고 저녁에 온 자에게는 적은 돈을 주지만, 삶의 패러다임은 모두 같이 먹고살게 해주는 것이다.
죽임의 경제
오늘날의 사회는 ‘경쟁과 이윤’,’출세와 성공’의 체제 논리를 바탕으로 돈벌이 논리위에 ‘사다리 질서‘로만 움직이는 자유주의시장이 다. 파괴의 생산성이란 자기모순을 ‘(물질적) 성공’이란 달콤함으로 사회를 중독시켜 온전한 판단을 마비시키고 있다. 순수경제학 논리의 합리성이 인간성을 철저하게 배제시킨 결과이다. 인간을 우주,자연,생태계,자연과 같은 거대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연을 ‘불변자본’으로, 인간노동력을 ‘가변자본’으로 변환시켜 만들어낸 ‘상호 파괴’의 결과이다. 자유로운 사색의 공간이어야 할 학교는 ‘쓸모’있는 노동력을 만드는 공장이 되버렸다. 일중독, 소비중독을 통해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며 ‘탐욕’을 인간의 본질로 왜곡시키고 있다.
“지구는 인간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지구가 몇 개 있어도 모자랄 것이다.” – 마하트마 간디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
길들여진 수많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선이다. 모순에 대한 부정을 통해 긍정이 이루어진다. ‘포기’가 아닌 다른 종류의 ‘선택’을 통해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피상적 욕구가 아닌 내면의 심층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뒤바뀐 삶의 목적을 깨우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돈과 일은 수단이고, 행복한 삶이 목적이다. ‘땅 파지 않으려면 공부나 해라’란 식의 맹목적 자녀교육의 현실이 오늘날 피폐한 농촌사회를 만들어냈다. 건강한 먹거리를 원하는 도시부모들이 시골아이적 듣던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삶의 질을 위한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 이다. 길들여진 모순에 대한 부정이야말로 참다운 자기긍정이다.
나부터 실천하는 자기혁명
인류사는 자치공동체 파괴의 역사나 다름없다. 산업화를 통해 파괴되어온 작은 공동체들이 점점 커져 지구공동체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란 간디의 말에 담긴 깊은 뜻처럼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죽임’에서 ‘살림’의 경제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자신이다.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셋이 되고,…온 인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나부터’란 생각만이 살림의 경제사회로 바꾸어 갈 수 있는 길이다.
“나 혼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 애먼 헤나시
“살림의 경제학 | 행복경제학”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