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꽃 소년. 박노해. 249쪽.

아직 피지 않은 모든 것을
이미 품고 있던 그날,
우리의 소년 소녀 시절에

이토록 순정하고 기품 있고
가슴 시린 이야기를 기다려왔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이야기다. 자기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해온 이야기, 자신만이 살아온 진실한 이야기, 그것이 최고의 유산이다…내가 남겨줄 것은 여기까지 품고 온 그 사랑의 불이고,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 걸어온 한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다…불안한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내 안의 소년이 말을 한다. ‘힘든 거 알아. 나도 많이 울었어. 하지만 너에겐 누구도 갖지 못한 미지의 날들이 있고 여정의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어. 그 눈물이 꽃이 되고 그 눈빛이 길이 될거야.’
“잘했다, 잘혔어. 그려 그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잘 물어물어 가면은 다아 잘 되니께.” #물어물어찾아간길 #사람이길이다
….아가 너는 개한 자들 멀리하고 참한 이들 만나서 참말만 하고 참사람으로 살아야 쓴다이.“ #장날할무니말씀 #참말 #참사람
어려운 사람을 사려 깊게 도와주고 진실한 마음을 담아 격려하는 사람, 배 한 쪽이라도 함께 나누고 자신은 맨 나중에 남은 것을 기쁘게 먹는 사람, 다들 나름의 근심과 사연을 안고 가는 이 고단한 여정에,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가 환해지고 담소가 꽃피는 열차로 바뀌게 하는 사람, 울 아부지 참말 멋진 남자다, 빛나고 자랑스럽다, 내가 바로 그 아들이다. 나는 잠든 아부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버지와함께한기차여행 #아부지
성서는 복음서라는데, 나에게 성서는 울음의 책이었다. 호세 신부님과 함께 더듬더듬 성서를 읽어나갈 때 내 가슴에 박히는 건 눈물과 탄시과 수난과 죽음이었다. 그랬다. 세상의 큰 울음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울음이야말로 복음이었다. 눈물이야말로 은총이었다. #성서 #눈물의책 #호세신부님
차가운 빗속에 몸에 돋는 소름과 하얀 입김, 가슴을 대우는 뜨거운 온기, 어둠 속에 일렁이는 등불과 노동의 춤사위 같은 긴 그림자, 빗소리를 타고 울리는 성가 소리…일을 마치고 어두운 밤길로 점점 멀어져 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나는 빗줄기 속에서 성호를 그었다. #빗속의등불들
엄니는 가만히 나를 불러 마루에 앉아보라고 하시더니 마당가로 걸어가 감나무를 부드럽게 한 번 흔들었다. 물든 잎사귀들이 떨어져 내렸다. 때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자 흙마당은 더 붉게 살아났고 대빗자루 자국은 더 또렷한 빗살무늬로 드러났고 떨어진 감 잎사귀는 연노랑 붉은색으로 선연히 빛나고 있었다. #참곱지야
“어둠은 무섭지라이.”
“그래, 무섭제. 무서워야제. 다 안 보이니까. 앞이 안 보이니까. 떨리는 걸음으로 삼가야 하는 것이제. 그랑께 빛을 밝힐라고 배우고 닦는 것이제. 그것이 공부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이제. 우주가 너의 집이고 너는 하늘님의 아이니께, 그 뜻을 깨치고 살면서 빛나는 마음으로 어둠 속의 길을 밝혀가는 것이제.” #천자문공부
아가, 사람이 나이 들면 다 주름지고 닳아지고 흙이 되는 거시제…좋을 때 안 쓰면 사람 베린다. 도움 주는 일 미루지 말고 있을 때 나눠야 쓴다잉. 다 덕분에, 덕분에 살아가는 것인께.” #내그리운동네한바퀴
“일이란 게 말이여. 평생 하는 일인디 말이여. 빨리빨리 하는 것도 좋지만 사이좋게 함시롱, 신명 나게 하는 게 더 중요하제이.” #동네한바퀴
원한은 말이시, 참말로 중헌 것이네. 원은 보듬고 풀어서 해원해야 하나, 한은 깊이 고이 품어가야 하는 것이제. 한에서 정도 나고 눈물도 나고 힘도 나오는 게 아니겄는가. #당골네아이
“성은 머땀시 무거운 짐을 지고 그 가파른 길로 댕긴다요.”
“재미진 길인께. 먹을 게 많응께. 노래하는 길이고 생각도 못한 인연을 만나는 길인께. 평아, 길은 말이제. 햇님과 바람이 가는 길이고 나무랑 꽃이 피는 길이고 땅의 숨소리랑 새와 풀벌레의 속삭임이 들리는 길이고 그리운 님을 만나는 길이고 추억이 쌓이는 길이제. 그랑께 길을 빨리빨리만 가믄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아’ 이 말이제.” #나의아름다운지도 #길
“연이 누나, 나는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잘 받아써주는 사람이 될라요. 입이 있어도 말 못 하고 맘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의 입이 되고 글이 될라요.” #달그림자연이누나
책을 펼쳐 들면, 그대로 다른 세계 다른 시간으로 이동해버렸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며 길을 잃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혁명가와 영웅들의 모험길을 동행하고, 어느 시인의 심장으로 숨어들고, 주인공의 첫키스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눈을 감고, 포성이 울리는 참호에 앉아 마지막 편지를 쓰고, 사막을 걷는 낙타의 등 위에서 더운 숨결을 따라 흔들리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길을 하얗게 떨며 말 달리고…책의 행간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책을 덮고 걸어 나오면 내가 사는 여기가, 동무들과 사람들과 익숙하던 일상이, 어주 낯선 세계처럼 느껴지곤 했다. #도서실의등불하나
…남 보고 사는 건 끝없는 모자람이제. 그것이 만병의 원인 아이겄나. 그니께 요런 꿈을 가져야겠다고 너무 재촉하지 말그라. 사람은 말이다, 뜻이 먼저다. 꿈을 딱 정해놓으면 뜻이 작아져 분다. 큰 뜻을 먼저 세워야제. 그라고 성실하고 꾸준하면 되는 거제. #꿈을찾아
내가 커 나온 시대는 어두웠고 가난했고 슬픔이 많았다. 다행히 자연과 인정과 시간은 충분했다. 그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난과 결여는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필요로 하게 했다. 쓸모 없는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노인들도 아이들도 제 몫의 일들이 있었고, 대지에 뿌리박은 공동체 속에서 우리 각자는 한 인간으로 강인했다. #작가의말
“참 곱지야! 가난했지만 마음 가득 행복했던 어린 시절” 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 가난했기에 서로에게 필요했고 쓸모 없는 이가 하나도 없던 마을 공동체 속에서 자랄 수 있던 그 시절, 오늘의 ‘풍요 속 빈곤’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순정하고 기품있는’ 온기 가득한 이야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