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with 동의보감 & 숫타니파타. 고미숙. 423쪽.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
우리가 코로나를 왜 이렇게 두려워할까요?…핵심은 ‘모른다’는 사실이에요…그런 관점에서 우리 삶을 한번 돌아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니체는 “현대인은 자기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는데, 자신에 대한 집착은 무척 강해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무지와 편견에 휩싸여서 엉뚱한 걸 ‘나’라고 고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엉뚱한 ‘자아’를 위해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거는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참 슬프고 어이없죠.
그러면 무엇을 보고 사는 거죠? 바깥을 보고 살아갑니다. 외부에 설정된 기준에다 그냥 나를 맞추는 거예요…그러니…모든 게 소외로 드러나게 됩니다…이 소외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하면 됩니다…생명이란 무엇인가? 답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앎을 향한 운동. 그래서 이걸 포기하고 외부의 기준에 맞춰 버리면 소외의 연속이 되는 거죠.
타인의 시선에 붙드린 삶. 질투심은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거칠고 지독한 감정이라서, 평생 동안 그걸 제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질투심을 벗어나는 게 윤리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시대 문화는 그걸 계속 부추기거나 더 한층 끌어올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너무 많은 것도 그 중 하나예요…다 경연으로…이렇게 경쟁이 일반화되면 부러움에서 질투로, 그러다 거기에 분노와 탐욕 같은 게 덕지덕지 붙고 그러다 보면 무지의 덩어리가 엄청나게 커져 버리죠…무지는 맹목과 일심동체라 무조건 달려가게 됩니다. 좀비들의 질주를 연상하면 됩니다.
대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엄청나게 폭식을 하거나 밤새 클럽활동을 하시거나 하겠죠…우리처럼 ‘공부하는 백수’는 밤을 절대 그렇게 보내지 않습니다. 백수는 밤에 잡니다. 낮에 충분히 활동했기 때문에…밤은 오롯이 충전의 시간인 거죠. 그런데 밤을 그렇게 뜨겁게 보낸다는 건 낮의 활동이 다 스트레스였다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까 밤에 그냥 잠들 수가 없는 거예요.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거죠. 그러다보니 낮밤이 뒤바뀌게 되고, 낮에는 소외와 스트레스, 밤에는 충동과 흥분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당연히 면역력이 떨어지겠죠? 이런 왜곡된 리듬을 바로 잡으려면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낮에는 활기 있게, 밤에는 평안하게.
욕망과의 거리두기. 코로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죠? 박쥐…천신갑…식탐과 성욕이 결합하다 보면 결국 기이한 야생동물로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이것들이 다 어디로 연결되어 있어요? ‘젊고 예쁘고 섹시하다’, 이 욕망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게 박쥐나 천신갑을 먹어 대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가 다 거기에 동참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 욕망의 화로를 다 함께 끊어야만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비전은 ‘욕망과의 거리두기’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비전…노동과 화폐가 주는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시간…바로 그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셔야 합니다…<동의보감>에서 말하는 몸에는 육체와 정신이 온전히 결합되어 있어요. 또 몸의 생리적 구조는 자연의 물리적 이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공간의 변화와 오장육부의 배치, 나아가 생로병사의 회로가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이런 과정을 양생이라 합니다. 양생을 잘 하면 긴장과 휴식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고, 노동이 아니라 활동, 즉 낮엔 활기차게 살고 밤에는 평온하게 쉴 수 있는 리듬이 만들어진다는 거죠. 이게 바로 면역력의 핵심이구요…또 하나, 물질이 아닌 정신의 면역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마음이 ’불안지옥‘인데, 각종 비타민을 먹는다고 그게 제대로 효능을 발휘할 까요?…이제 생리적 위생뿐 아니라 정신적 위생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왜 인의예지신을 지키지 못할까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죠. 구체적으로 식욕, 성욕이잖아요. 식욕과 성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수신제가는 물론이고 치국평천하는 불가능합니다…먹방..자꾸 이상한 음식이 땡긴다, 밤만 되면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그러면 위험신호라고 보시면 됩니다.
먹고살 만한데 타인들과 연결되지 않는 것, 그 마음이 우울증이거든요. 인간에게는 마음의 연결이 정말 중요합니다. 마음은 전 우주의 파동으로 이어져 있습니다….마음이 병드는 이유는 다른 게 없어요. 고립과 단절입니다.
불교, 마음의 과학. 마음이 대한 탐구를 2600년 전에 어마어마하게 하신 분이 붓다입니다…심리학..정신과 상담…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얕은 지식..달라이라마가 종종 서양 심리학에 대해 ‘킨더가르텐(유치원)‘이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서양 심리학은 역사가 짧은 터라 인간의 심층을 탐사하는 데는 취약하다고 보는 거죠. 그러다 보니 결국 유년기, 그리고 가족관계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연기론, 윤회)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일상적이어야 됩니다.
가장 기술문명에 노출되어 있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가장 영성을 필요로 하는 세대가 등장한 거예요…내면은 한없이 공허…자신에 대해 뭔가 특별한 네비게이션을 발견한 느낌…사실 그게 고전의 진정한 용법이기도 하구요…바야흐로 자본과 영성이 마주치는 시점이 온 거예요.
석가모니가 35세에 깨달았으면, 이건 청년의 사상인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불교를 노년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왠지 불교 공부는 늙은 다음에 하는 거라는 선입관이 있는 거죠. 또 스님이라고 하면 대체로 나이 지긋한 노승을 떠올리잖아요. 어쩌다 불교가 이렇게 노년의 사상이 되었을까요? 무지와 편견의 소산인 거죠.
양생이 필요한 시대. 진짜 양생은 몸과 마음을 같이 돌보는 것입니다…피곤하면 쉰다. 마음이 괴로울 땐 더더욱 쉰다…그런데 이런 건 왜 학교에서 안 가르쳐주는 걸까요?…법을 지켜라, 상식을 지켜라, 민주시민이 되어라, 약자를 배려해라, 이런 건 강조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아요. 인격적 완성이라는 게 결국은 욕망과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말입니다.
자본주의는…자본의 생산, 유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놓고 몸과 우주, 생명과 자연은 종속적인 변수로 취급합니다. 자본의 증식을 위해 몸과 생명을 불태우라는 명령인 거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 재난과 기후위기입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몸과 우주를 기준으로 놓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필요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무책임한 아버지…영창대군과 광해군…그런데 재미있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과정을 비슷하게 겪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조카한테 후계 자리를 물려주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젊은 애첩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그 애첩이 임진왜란 와중에 아들을 낳은 거예요…딸이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동아시아 전체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인간도 애첩이 낳은 아들한테는 아무런 이성이 작동을 안 한다는 거,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공부는 함께 하는 것. 주변에 늘 스승과 벗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병증과 결함을 알아채고 질책해 주는! 그게 바로 공동체고 네트워크입니다. 그러니 꼭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삶의 비전을 공유하는 스승과 벗이 있는가? 아니라면 당장 그 관계망을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원래 불교에는 상이 없어야 되잖아요. 붓다는 신이 아니라 스승이고 불교는 모든 표상을 타파하는, 오직 다르마에 의지하는 가르침인데, 불상을 만들고 그걸 숭배하는 것은 불교하고 맞지가 않습니다.
‘요절할 사람은 장수하게 하고, 장수할 사람은 신선이 되게 한다.’ 이게 <동의보감>이 제시하는 양생적 비전이에요.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해방과 구원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오직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그래서 요가라든가 명상이라든가 하는 이런 기술이 없어요. 내적인 잠재력을 일깨우기보다는 신의 계시나 응답을 기다리는 데 몰두합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는데, 만약 응답이 없다면 너무 괴로운 일이겠죠? 카렌 암스트롱 같은 비교종교학자도 어렸을 때 수녀원에 들어가서 7년인가를 늘 기도하고 간구했지만 그 어떤 계시나 은총이 내리지 않는 거예요. 결국 마음의 병이 깊어져서 수녀원을 뛰쳐나오고 말죠. 이런저런 방황 끝에 종교학과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게 됩니다.
서양이 주로 유일신이나 초월자에 의존하는 데 반해 동양에서는 자연의 신성함과 우주적 전체성이 다 내 안에 있다고 봅니다. <동의보감>이 몸과 자연의 대칭성에 주목한다면, 불교는 마음과 우주의 활발한 상호의존성을 중시합니다. 우리의 몸은 아주 제한적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전 우주와 온전히 공명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이렇게 마음에서 우주로 연결되는 그 통로를 열어서 ‘스스로 붓다가 돼라’는 겁니다.
부처님 전생. 스스로 육신을 던져서 호랑이 밥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할 텐데, 그건 우리같이 자아에 갇힌 중생들이나 하는 생각….진정한 이타심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을 표현하는 셈입니다.
“내가 옳다“, 이게 분노의 원천이라는 뜻이죠. 부처님 당시에도 견해의 차이로 싸우는 수행승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그 나라 언어체계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가 단순한 수단이나 매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고대어, 초기경전, 한역, 번역)
모든 독에는 꿀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이 삼독에 묻어 있는 달콤함 때문이죠…선택은? 당연히 본인의 몫.붓다는 괴로움을 대신 씻어 줄 수도, 번뇌의 늪에서 건져 줄 수도 없어요. 다만 길을 안내해 줄 뿐입니다.
<동의보감>이나 불교는 깊이 상통합니다. 양생이건 해탈이건, 신선이건 붓다건,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몸의 차원에서, 불교는 마음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고요.
“도로써 병을 치료한다”
우리가 병을 고칠 때 아픈 부분의 통증과 상처만을 치유해서 해결된다고 하면 그건 기계죠.
이기적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지혜롭다는 건 타인과의 공감이라는 덕목과 분리될 수 없어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동의보감>을 포함한 중화문명권에는 감정에 대한 정교한 탐구가 부족한 편입니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음양오행에 육십갑자, 오윤육기 등으로 이어지는 굉장히 정교한 논리체계가 있지만, 마음을 미세하게 분석하는 건 불교가 압도적이죠.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양생술의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언어를 정확하고 투명하고 담담하게 구사하라고 합니다…묵언수행이라는 것도 우리가 아는 오염된 언어를 멈추기 위함이지, 깨달은 다음에는 말을 청산유수로 해야 합니다.
흔히 운이 좋다는 건 횡재수를 주로 말하는 거 같은데, 사실은 그보다 더 핵심은 사람이 와야 하는 겁니다. 사람이 오면 뭐라도 들고 와요…그런데 사람이 안 오고 돈만 오면 그건 정말 위험합니다. 로또 맞고 인생 폭망하는 경우가 그런 거겠죠. 제일 중요하면서도 쉬운 것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 심지어 자기가 내뱉는 발음까지, 그 모든 걸 최고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지혜는 지식이 아닙니다. <주역>의 언어로 말하면, 나아가야 할 바, 즉 삶의 방향성 같은 것입니다…지혜가 있으면 유머가 있어요. 유머가 최고의 소통기술입니다. 청년들의 개그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인생의 깊은 맛, 여유와 관용 같은 게 우러나야 해요. 오히려 청년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언어들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익숙한 통념과 진부한 레파토리를 벗어날 수 있는! 연람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과 같은 그런 거 말입니다…그래서 다시 결론은? 네,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동양의 위대한 현자들은 다 유머러스합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삶은 점점 더 소박해져야 해요.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고, 디지털이 세상을 다 연결시켜 주는데, 왜 우리가 더 복잡하고 화려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할까요? 그건 우주의 이치에 완전히 어긋나는 겁니다. 해도해도 너무한 거죠. 신체적으로 보자면, ‘음하화동’의 극치예요.
불교는 참 특이한 게 무신론이잖아요…대부분의 종교는 죽은 다음에 신들의 세계에 태어나는 걸 목표로 하죠. 그래서 많은 재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려서 그 신에게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를 알려면 직접 배워야 합니다. 역술가한테 상담을 하면 일단 알아듣기가 어려워요…부디 스스로 배우세요. 자기가 자기 사주를 읽어 내면 얼마나 편합니까.
신구의! 업장의 현주소. 행위와 말과 생각.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어떤 말을 하느냐, 어떤 동기를 갖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바꾸지 않으면 삶이 거친 상태 그대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글쓰기 말고 생각과 언어를 바꿀 수 있는 훈련이 없어요.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것과 공감하려면 나의 자아를 점점 비워야 되겠죠. 사심이 가득하면 공감도 불가능할뿐더러 감정적 폭력을 행사하게 돼요…어떤 사람이 내공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마음을 비울 수 있는지’에 달려 있는 겁니다…무용지용….우리가 어떤 집이 ‘참 좋다’는 건 빈 곳이 많다는 뜻이죠. 정말 부잣집은 창문으로 숲이나 호수, 아니면 하늘 같은 게 보여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빈 것들이 그 건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겁니다.
일본의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인류학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모도 연인도 아닌, 사제관계라는 거예요. 그래서 티베트불교에서는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스승이 없다고 하면 ‘스승이 없다면 귀신이 아닐까’ 이렇게 의심한다고 합니다. 귀신이 아니고 인간인데, 어떻게 스승이 없냐는 거죠.
이제야말로 심플라이프가 문명의 비전이 되어야 해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첫 강의의 화두였는데, 마지막 강의의 핵심은 ‘좋은 벗과 함께 가라’입니다.
좋은 벗의 기준은 간단해요. 친구이면서 스승이어야 하고 스승이면서 친구여야 하고, ‘우정’과 ‘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벗이 아닌 자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아닌 자 벗이 될 수 없다, 이탁오)
활인법. 도교적 양생술. 음양탕. 고치법.
퇴계 선생이나 사대부들, 선조나 정조 같은 왕들은 의학적 수준이 아주 높았고, 특히 활인법이라고 하는 도교 양생술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음양탕이나 고치법 같은 거죠. 저도 아침마다 꼭 하는데요. 음양탕이 뭐냐 하면 따뜻한 물을 절반 넣고 그다음에 찬물을 부어서 음양이 순환되도록 한 다음에 물을 마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을 마실 때도 물 분자가 아니라 물의 활발한 기운을 먹는다는 원리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