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미숙
허준이 ‘의성’이 된 건 명의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슨 소리? 허준이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전통의학의 아이콘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건 의사로서가 아니다…허준을 능가하는 명의들은 많았다. 하지만 허준처럼 <동의보감>이라는 대저서를 남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던가. 유배기간은 1년 8개월.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유배지는 그에게 집필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다. 대반전! 만약 이 작업이 없었다면 유배생활은 얼마나 억울하고 쓸쓸했으랴…<동의보감>은 무엇보다 그 편천자인 허준의 생을 구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다. 흔히 생각하듯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있었기에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의술이 높은 것과 방론을 저술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나라 허윤중이 책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책을 써서 후세에 남기기를 권하였다. 그가, “의술은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곰곰이 궁리하면 터득할 수 있다. 맥을 보는 것은 그윽하여 명확하게 알기 어려우니 마음으로 이해가 되나 말로는 제대로 나타날 수가 없다…맥의 오묘한 원리는 말로 전할 수 없고, 헛되이 방론을 저술한다고 해도 끝내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책을 쓰지 않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무릇 대의가 병을 치료함에는 반드시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 뜻을 안정시키며 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갈구하는 것도 없이 하여 먼저 크게 자비롭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먼저 발하고 중생들의 고통을 널리 구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공을 좇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다면 중생들의 대의라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라면 백성들의 큰 도적인 것이다.
의학, 글쓰기를 만나다
허준은 의사이기 이전에 학자였다. 학자란 문장가를 뜻한다…사람들이 의서를 독서의 범위에 두지 않는 것은 전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글쓰기의 부재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와 결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정보가 있다 한들 매뉴얼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매뉴얼 상태로는 결코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만큼 텍스트의 가치를 규정하는 데 있어 글쓰기라는 배치는 의미심장하다.
<동의보감>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이런 식의 이야기들과 마주친다. 다 모으면 민담집 하나는 될 정도다.
당시는 구술의 시대였다. 문자가 아니라 말을 통해 담론들이 흘러다녔다. 문자와 수술은 단순히 매개 수단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자의 세계에선 담론들 사이의 경계가 선명하지만 구술의 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량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알면 보인다’고, 똥오줌에 대한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다. 또 ‘아는 만큼 사랑한다’고 공부가 깊을수록 똥오줌이 한결 친근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동의보감>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몸에 해롭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시대 샤워문화와 양생의 리듬은 서로 어긋나는 셈이다. 샤워문화처럼 에콜로지에 ‘반하는’ 요소도 없다…이 또한 똥오줌과 분리에서 비롯된 생태적 재앙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