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전쟁. 카렌 암스트롱. 608쪽

우리와 전쟁의 관계는 복잡한데, 그것은 어쩌면 전쟁이 인간 발달에서 상대적으로 늦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수렵-채집인은 우리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조직적 폭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었다…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 곡물을 생산…마침내 필요한 것 이상의 식량을 재배…그 결과 인간의 수가 급격히 불어났고…놀랄 만큼 짧은 시기…인간 대다수가 농경 생활로 옮겨 갔다. 농업과 더불어 문명이 나타났고 문명과 더불어 전쟁이 나타났다.
인류학자들은 현대의 수렵-채집인 사회가 계급이 없고 경제는 ‘일종의 공산주의’이며, 사람들은 기술이나 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되는 관용 친절 차분한 성격 같은 자질로 존경받는다는 데 주목해 왔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는 사회에서는 작은 집단이 자신의 부를 위해 이 잉여를 착취하고 폭력을 독점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이런 체제 폭력은 모든 농경 문명을 지배했다…힘에 의해 수립되고 군사적 공격에 의해 유지되는 농경 국가에서 전쟁은 국가의 본질이었다. 땅과 거기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은 부의 제일 원천이었으며, 영토 정복은 농경 왕국이 세입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전쟁은 모든 농경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시점에 우리의 세계는 위험하게 양극화되어 있다. 우리 시대의 도전에 응하여 모든 민족이 평화롭게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지구적 사회를 창조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 #신의전쟁 #카렌암스트롱
사실 주민 대다수를 파렴치하게 착취하지 않고는 도시 생활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기원전 3000년에 이르면 메소포타미아 평야에는 열두 도시가 있고, 각 도시는 주변 농촌의 농민이 경작하는 농작물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농민은 최저 생활 수준으로 살아갔다. #농경의시작과전쟁의탄생 #길가메시 #우르크 #도시 #농촌 #도시는농촌이먹여살린다
수메르는 농업이 경제적 기초 역할에서 물러나는 근대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농경 국가를 지배하게 될 구조적 폭력 체계를 만들어냈다…그러나 주민 대다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런 잔인한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진보를 가능하게 해준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일이었으며 개인적 신앙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신들의 신전은 예배 장소가 아니라 경제의 중심이었다…이 정교한 체제는 국가의 구조화된 폭력을 부정직하게 정당화했다…대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체제는 철칙처럼 보였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문명의 증거는 동시에 야만의 증거이기도 하다.”
농경 사회 지배자들은 국가를 사적 소유물로 여겼으며 자신의 부를 위해 국가를 마음대로 착취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역사에는 그들이 농민에게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고 암시하는 기록이 없다.
‘선견지명이 있는’ 엔키는 용감하게 신들에게 맞서서 그들의 삶이 인간 노예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농민 #착취 #잉여 #구조적폭력
그러나 아누의 계획을 이행하려면 엔키두는 평화를 사랑하는 야만에서 공격적인 문명인으로 바뀌어야 한다…문명인은 기본적으로 전쟁의 인간,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한 인간이었다.
길가메시에게 전쟁이라는 조직화된 절도 행위는 고귀할 뿐 아니라 도덕적이며 개이의 부만이 아니라 인류의 이익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시는 이미 젊은 남자들이 의미 없는 문명 생활을 못 견뎌 했음을 암시한다…이 때문에 의미를 찾으러 전장에 나간다…결과는 비극적이다.
신화란 단순히 어떤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민족의 일상적 삶 밑에 깔린 시간을 초월한 진실을 표현했다. 신화는 늘 지금에 관한 것이다.
아리아인은 전사의 삶이 권태롭고 늘 부지런해야 하는 농경 생활보다 훨씬 낫다고 보았다…“아니, 사실 그들은 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힘든 노동의 땀으로 얻는 것이 비굴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노동을 경멸하여, 노동이 열등감의 표지이고, ‘고귀한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들은 군주의 분신 역할을 하면서 문명의 생존에 필수인 구조적 폭력을 축성했다. 농경 제국은 민중을 대리한다든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지배 계급은 농민으로 이루어진 주민을 실질적으로 다른 종으로 여겼다. 지배자는 제국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군대를 자신의 사병으로 보았다.
네 가지 텍스트 가운데 가장 신성한 리그베다. 리그베다는 인간의 말로 번역된 리타, 즉 ‘신성한 질서’였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에게 이 텍스트는 전혀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텍스트는 개인의 헌신 대신 전투의 영광, 살인의 기쁨, 독한 술의 환희, 다른 사람의 가축을 훔치는 일의 고귀함을 찬양한다….아리아인은 정착 생활의 권태와 시시함을 증오하여오직 약탈에서만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말하자면 영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푸루샤의 몸에서는 아리아 왕국의 새로운 사회 계급도 싹텄다.
사제는 그의 입. 그의 두 팔로 전사를. 그의 허벅지는 평민 바이샤가 되었고, 그의 발에서 종 수드라가 나왔다.
따라서 푸루샤 찬가는 새로운 아리아 문명의 핵심에 놓인 구조적 폭력을 승인했다…모든 사람에게 희생이 기대되었지만 가장 큰 희생은 하층 계급에게 요구되었고, 이들은 노예의 삶을 살 운명이었으며 열등하고 저열하고 불결하다고 낙인 찍혔다.
신을 섬기는 자는 이제 안을 보았다. 우파니샤드의 초점은 아트만, 즉 ‘자아’…이렇게 되면 바르나 체계의 구조적 폭력을 지탱한 정교한 의식을 거행할 필요가 없었다…이 관념은 도전적인 독립 선언이었으며 영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혁명이었다.
비폭력의 두 길, 자이나교와 불교
마하비라에게 해방을 얻는 유일한 길은 만인과 만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계발하는 것이었다…자비를…모든 사람들에게…이것을 일관되게 실천에 옮기면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불가능해졌다…저이나교도는 우파니샤드의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에 몰두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나 구조적 억압은 불가능해진다.
자이나교는 나중에 복잡한 신화와 우주론을 발전시키지만 초기에는 비폭력이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주기도문과 비교되는 기도문!)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하소서! 약하건 강하건, 지위가 높건 중간이건 낮건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살아 있든 아직 태어나지 않았든 그들 모두가 완전히 행복하게 하소서!
아무도 거짓말을 하거나 어디에서 어떤 존재도 경멸하지 않게 하소서!
분노에서든 증오에서든 아무도 어떤 피조물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품듯 우리가 모든 피조물을 소중히 품게 하소서!
사랑이 가득한 우리 생각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하소서, 위로든, 아래로든, 옆으로든
가없이, 온 세상을 향하여 가없는 선의,
제약 없이, 증오와 적의에서 자유롭게!
불교는 그냥 폭력을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고 행복을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아소카의 딜레마는 문명 자체의 딜레마다. 사회가 발전하여 무기가 치명적이 될수록 폭력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제국은 역설적으로 평화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바가바드기타>든 <마하바라타>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는 쉬운 답이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우리는 평화를 갈망하는 폭력적인 마음을 지닌 결함 있는 생물이다.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폭력에 의한 가짜 평화!
로마의 완전히 직업적인 군대는 그때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능률적인 살인 기계였다. 조금만 저항해도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다…도시를 차지할 때 그들의 정책은 “모두 죽이고 하나도 살려 두지 않는다”였다….이런 잔혹성의 목적이 종속된 민족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기독교인 황제’라는 모순 어법
제국의 무기가 된 신앙.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분명히 엄청난 사건이었다. 기독교는 아직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는 아니었지만 마침내 로마법에서 인정을 받았다…그러나 제국의 후원을 받아들인 가독교인들은 일부 눈에 띄는 부조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지만 기독교인 황제는 엄청난 부를 누렸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같은 식탁에 앉는다고 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예외적인 고귀한 상태에서 살았다. 기독교는 억압적인 농경 국가와 연결되면서 불가피하게 오염될 수밖에 없었다….예수도 초대 기독교인도 기독교인 황제라는 개념만큼 엄청난 모순 어법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뒤 일부 가독교인은 점차 황제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들은 기독교 로마가 제국 국가의 잔혹성과 폭력을 어떤 식으로든 없애는 유토피아가 되리라고 기대했으나 오히려 로마의 호전성이 교회에 침투했음을 알았다.
군주제는 군대에 달려 있고 군대는 돈에 달려 있다. 돈은 지세에서 나오고 지세는 농업에서 나온다. #농경국가 #군주제 #농업
그들 자신의 지역 전승에 따르면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의 후손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높은 신 알라-그의 이름은 단순히 ‘하느님’이라는 뜻이었다-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랍인에게는 배타적 계시나 그들만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관념이 없었다. #이스마엘 #유대교 #기독교 #하느님 #알라 #같은하느님의후손들
쿠란, 무자비와 자비의 공존. 군사적 폭력에 관한 단일하거나 체계적인 쿠란의 가르침은 없다. 때때로 신은 싸움보다는 인내와 자제를 요구한다. 때때로 방어적 전쟁을 허용하고 공격을 비난하지만, 다른 때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 공격적 전쟁을 요구한다. #쿠란 #모순된가르침 #모순의합리화
어떤 전통적 제국이든 정부의 목적은 주민을 인도하고 주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군대는 돈으로 유지되는 경비 집단이며, 돈은 신민이 제공하는 불가결한 자원이다.
초기 식민주의자들은 약탈을 위해 대규모 습격을 하듯이 신세계로 격렬하게 돌진했으며, 탐욕이 경건한 의무와 아무 충돌 없이 섞였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은 식민지 기획에 깊이 공감했다.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유토피아인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원주민들과 싸우는 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신대륙 #유토피아
엘리트 가운데 이단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이단은 자신들이 믿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하거나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토머스 모어는 헨리8세의 대법관이었을 때 정치적으로 위험한 이교도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렸지만, 그 자신도 헨리를 성공회 수장으로 섬기는 ‘지상권 승인 선서’를 거부하여 처형되고 만다. #사랑의탈을쓴악마
간디의 세계관에서 중심은 우파니샤드에서 처음 개진된, 만유가 브라흐만의 현현이라는 통찰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신성한 핵심을 공유하기 때문에 폭력은 온 우주의 형이상학적 경향과 어긋났다…“모든 곳에 스며 있는 보편적 ‘진리의 영’을 마주보려면 가장 작은 미물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진리에 대한 헌신은 삶의 모든 분야에 관여를 요구했다. 그래서 간디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종교가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이다. #간디 #폭력이불가피한정치세계에서비폭력이가능한가 #종교는삶의정치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뒤에 물었다. 우리는 지금 서로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의 역사와 서로의 비극에 얽혀 있다. #카인과아벨 #아우를지켜야하는사람
누가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사람들이 종교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많은 전쟁과 억압과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많은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 대답은 물론 ‘그렇다’가 되어야 한다.
전쟁은 ”관계를 보지 못하는 무능력”이 원인이라고 이야기되어 왔다…우리는 오늘날 과거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사람들이 현재의 ‘경제적, 역사적 상황’의 다루기 힘든 딜레마와 마주하도록 도와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제는 농경 제국의 억압적 불의와 싸우지 않지만 여전히 큰 불평등과 권력의 불공정한 불균형이 있다…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의 자기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서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종교의 역사에서 십자군과 지하드만큼이나 중요한 ‘내어줌’, 이타심, 동정심을 요구한다. #종교의역할 #내어줌 #공존 #미래 #평화 #죽음의욕망 #생명의종교
우리는 세계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구축하고 모두에 대한 존중과 평정의 감각을 계발하고 우리가 세계에서 보는 고난에 책임을 져야 한다…종교적인 사람이든 세속주의자들이든 우리 모두 현재 세계의 상태에 책임이 있다. 마마바 비비의 아들이 “아주 간단히 말해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은 국제 공동체의 오점이다. 희생양 의식은 공동체가 그 비행과 맺고 있는 관계를 끊으려는 시도였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신은 당연히 “그렇다”는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