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카렌 암스트롱. 285쪽
“나를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종교는 말을 넘어선 상태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말의 형식을 빌려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부처는 우리에게 우리말로, 또는 한자어로, 또는 한자어로 표기된 먼 나라 말로 이야기를 한 지 오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존엄한 존재라 하더라도 개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교도는 스스로 동기를 이끌어내고 자신의 노력에 의지해야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그의 가르침이지 그의 삶과 인격이 아니었다.
서구에서는 개인주의와 자기 표현을 높게 사지만, 이것은 단순한 자기선전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고타마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깜짝 놀랄 만한 완전한 자기 포기이다.
닙바나의 자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경험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타마 시대의 인도 현자들은 이런 해방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서양 사람들은 인도 사상이 부정적이고 허무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인도 사상은 놀랄 만큼 낙관적이며, 고타마는 누구 못지않게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사실 타나(욕망)와 거기서 나오는 캄마가 없다면 사회는 정지할 것이다.
…불확실성을 버리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도움이 안 되는 정신 상태 때문에 괴로워 하지 않아도 된다…이렇게 요가 수행자는 증오, 나태, 불안, 불확실성을 “마음으로부터 씻어낸다”…훗날 고타마는 자신이 창안한 새로운 요가 방법을 통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 즉 갈망이나 욕심이나 아집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다…동시에 동정심이라는 규율이 형벌과 같은 금욕주의를 대신한다. 고타마는 수도자가 동정심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성 가운데 지금까지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부분에 접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동정심. 전통적인 요가에서 요가 수행자는 무감각한 자율성의 상태를 구축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점점 줄여나갔던 반면, 고타마는 다른 모든 존재를 향한 완전한 동정심 속에서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낡을 규율과 자비를 융합했다.
깨어 있는 마음과 가없는 마음의 목적은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자기 중심주의의 힘을 꺽자는 것이었다.
이 진리들에 눈에 띄게 독창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고타마는 이 통찰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진술이라고 주장했다. 이 길은 존재의 구조 자체에 씌어져 있었다…붓다는 네 가지 진리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독특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자신이 현시대에 이것들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현실로 만든 첫 사람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다…악보에 적힌 음악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거나 능숙한 연주자가 해석할 때에만 드러난다.
그는 이 진리들의 인간구현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고타마가 행동하고 사건들에 반응하는 방식을 관찰하면 담마가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형체를 한 닙바나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파리닙바나는 우리 자신이 깨달은 자가 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전자장입니다. 그것에 해당하는 말이나 개념은 없다…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말은 없다…세속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납바나는 ‘무(無)’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 경전…이 텍스트의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역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닙바나 발견과 관련하여 시간을 초월한 이미지를 그려내고자 하였다…불교는 기본적으로 심리적 종교…이 텍스트 가운데 어느 대목도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말해 주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며, 독자가 자기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석가모니! 사람들은 그를 흔히 사갸무니(석가모니)라는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이것은 삭캬 공화국 출신의 ‘말 없는 자’ 라는 뜻이다. 그가 얻은 지식은 말로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마를 가르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나만 지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붓다는 교리나 신조를 싫어했다. 그에게는 제시할 신학이 없었다…붓다는 늘 제자들에게, 들은 말을 근거로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가르침 역시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검증하라고 말했다. 종교적 관념은 정신적 우상이 되기 십상이다. 담마의 목적은 사람들이 버리도록 도와주는 것인데, 집착할 것만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다.
그러나 축의 시대 인도에서, 지식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하게 되지만, 붓다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계발한 깨어 있는 마음의 요가를 통해 생각할수록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망상이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불교 예술은 보통 붓다가 홀로 앉아 고독한 명상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상 붓다는 담마를 설교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 무리에 둘러싸여 살았다.
“자, 칼라만인들이여, 들은 이야기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남의 말만 믿고 진리라고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토론이 끝날 무렵, 칼라만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붓다의 담마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상가는 자발성에 기초한 제도 가운데 지상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제도로 꼽을 수 있다…그 지속성은 우리에게 인간성과 인간생활에 대하여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을 바탕으로 한 커다란 제국은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빅쿠들의 공동체는 약 2,500년간 유지되었다.
“나를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타타가타, 사라진 자! 그는 이제 자아가 없었다. 그의 자기 중심주의는 소멸되었다.

붓다가 그의 삶 가운데 45년을 사람들 눈앞에서 살았음에도, 텍스트들은 이 길고 중요한 단계를 대충 다루듯이 다루기 때문에, 전기 작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예수의 경우는 그 정 반대이다. 복음은 예수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그가 전도를 시작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붓다의 설교법(대화법)! 붓다는 그를 꾸짖지도 않았고, 아낫타에 대한 토론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여덟 가지 길에 대하여 설교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파세네디의 관점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붓다가 그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했다.
불교의 신화가 아닌 인간 붓다로서의 삶을 알고자 기록된 텍스트 속에서 찾아낸 붓다의 전기. 신의 아들로 살아간 예수의 공생애만이 기록된 복음서와 달리 인간 붓다로서 깨달음의 과정에 이르는 한 인간의 삶에 초점을 둔 텍스트들을 통해 새로운 인간, 완성된 인간, 깨어난 사람으로 생애를 마친, ‘삶 자체가 참 경전’인, 인간 붓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훌륭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