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붓다. 고미숙. 366쪽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게다가 놀랍게도 그는 청년이었다!
청년이 어떻게 그럴 수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청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년의 활기, 청년의 열정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성취였다.
붓다가 번개라면 청년은 피뢰침이었다고나 할까.
21세기 들어 다지털혁명으로 유례없는 혁신을 거듭했건만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내면은 여전히 초라하고 빈곤하다.
도시와 숲, 그 ‘사이’에서
불교 수행의 목적은 은둔이 아니다. 삶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결정적으로 붓다의 사상은 도시문명의 산물이다…너무도 당연한 것이 수행자들은 모두 탁발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도시문명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불교는 은둔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 마음의 혁명
우리는 늘 “왜?”, “왜?”라고 물었죠. 결코 쉽게 “예스”라고 하지 않습니다.-달라이 라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혜택은 경천동지할 수준이다. 그럼 그에 비례하여 정신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가? 불평등은 해소되었는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격차는 더 벌어졌고 마음은 더 황폐해졌다.
마음의 영역은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다. 한마디로, 경계가 없다. 그러니…펜데믹이 던져 준 시대적 미션, 기후재난에 대처하는 길, 인간과 자연의 대칭성을 회복하는 길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붓다다.
붓다는 신이 아니다. 인간이다…붓다는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 “순수하게 인간으로 남아 있기 바랐던 인물이었다”.아울러 “신이나 외적인 힘에서 오는 어떠한 영감도 요구하지 않았다.”
숫타니파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렇다. 범 같고, 황소 같고 사자 같은 존재! 그게 고타마 사문이 내뿜는 아우라였다. 대체 어디에 도피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있는가…이보다 더 능동적인 행동과 실천은 없다!
바람과 사자, 그리고 연꽃의 노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도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의 경>
그는 오직 인간이 생의 근원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복에 이르는 길만을 가르쳤다. 그런 점에서 그의 언어에는 원천적으로 은유가 없다! 화려한 수사학 역시 존재의 실상을 가리고 망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한낱 낭만적 수사가 아니다. 존재를 걸고 구현해야 하는 화두다!
열두 살 때 무슨 일이?
우리는 보통 출가의 동기를 세속적 삶에 대한 불만과 결핍에서 찾곤한다. 그거야말로 무지와 편견의 소산이다. 불만과 결핍은 결코 구도의 동력이 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여여(如如)!
보통 농촌의 풍경은 낭만적 이미지에 의해 채색되기 일쑤다…평화로운 전원이라고 간주한다. 그 순간 거기 담긴 생존경쟁과 피•땀•눈물은 증발되어 버린다…이미지와 상징에 의해 조작된 판타지, 그것이 풍경이다. 어디 농촌뿐이랴. 이런 식의 전도망상이 도처에 난무하다 보니 삶이 온통 판타지가 되어 버렸다.
열두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있나, 이런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다…하지만 그거야말로 전도망상이다…생각해 보면 10대는 세상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으로 충만한 나이다…고등학교, 대학교를 진학하는가 그런 질문들은 자연스레 ‘침묵, 봉쇄’되었지만.
기후문제를 제기한 툰베리도 10대다…여기에는 특별한 천재성도 대단한 전문지식도 필요하지 않다.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면 된다…요컨대, 열두 살은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내가 누리는 즐거움이 누군가의 고통에 기반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행복일 수 없다. 지배층들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이 폭력의 구조야말로 모든 인류의 생에 내재된 ‘카르마’다…이것이 열두 살 태자가 바라본 문명사회의 실상이었다.
연민과 공감의 파동. 관찰과 질문, 그리고 명상. 그것은 현실에 대한 도피나 힐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먹이사슬로 이어진 모든 존재의 고통에 대한 통찰과 연민의 과정이었다…연민과 공감을 넘어 깊은 통찰로 나아갔다. 본성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영적 파동에 공명한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신심 깊은 불자가 된다.
송첸감포 왕은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티베트문자를 창안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문자를 창안하더니, 놀라운 나라다!
결국 남는 건 ‘타는 목마름’이다.
태자가 누린 환락은 결국 감각의 극대화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그리고 성적 열락이 주는 환각. 당시 인도의 상황에서 최고 수준이라 하겠지만 솔직히 이 정도야 우리 시대 청년들에겐 평범한 수준이다. 게임의 판타지, 포르노의 범람, 무제한 음원 스트리밍, 상품의 스펙터클 등을 따올려 보라….붓다 시대엔 소수가 독점했던 감각적 쾌락을 이젠 다수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헌데, 어떤가?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기는커녕 더더욱 부족하게 느껴진다.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왜? 죽음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을 모른다면 삶 또한 이해할 수 없다. 하여, 삶 또한 슬프고 괴롭다.
천국이나 신들 역시 윤회의 한 과정…하여 오래 사는 것, 죽어 천국에 태어나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바라문교의 생애주기(학습기/가주기/임서기/만행기)…하지만 우리 시대로서는 저런 생애주기조차 부럽기만 하다. 현대인의 생애주기는 오직 노동을 위한 학습, 화폐를 위한 노동이 전부다.
붓다는 시대의 산물!
북문의 수행자들은 시대의 나침반이었다…붓다 역시 시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어떤 점에서 보면, 싯다르타는 다소 ‘뒷북’인 셈이다.
참 슬픈 노릇이다. 제국의 영광이 인간에게 주는 보상이 오직 환락뿐이라는 사실이.
하긴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다. 엄청난 부의 보상은 소유와 소비를 통한 감각적 쾌락뿐. 거기에 탐닉한다면 중독될 것이고, 탐닉할 수 없다면 공허에 빠져버린다. 인간적 완성이나 지혜, 마음의 평정 따위는 아예 설정조차 하지 않는다.
라훌라!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하긴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장애물이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아들은 아버지의 상극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그렇다. 물은 본래 깨끗했지만 발을 씻으므로 더러워져서 아무도 먹지 않으려고 하지 않느냐? 그것처럼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지만 거짓말하고 살생하면 더러워져서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출가의 파트너, 찬타카와 칸타카…마음이 통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 대체 누가 이들의 길을 막을 수 있으랴. 이런 마음의 파동과 공명이야말로 청춘의 에로스다. 창조와 전복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로서의 에로스!(금란, 단단한 쇠붙이도 끊을 수 있는 향기로움)
출가야말로 가장 능동적이고 가장 자율적인 선택이다. 원망과 자책, 은둔과 피세 같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 불교가 결코 니힐리즘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어머니의 사랑 또한 오직 감각적 쾌락에만 쏠려 있다는 것이 참 서글프다. 2,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는 것, 아니 더더욱 심해졌다는 걸 생각하면 서글픔을 넘어 서러움이 밀려온다.
스승이 없는 구도는 공허하다. 방향과 지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타마는 바람이었다…그는 제자들이게 자신의 가르침마저 ‘강을 건너면 놓아 버려야 하는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충고했다.
욕망. 익힌 음식은 그 자체로 카르마를 두텁게 한다…곡식 자체가 타인의 노동이 투여된 것이고, 모든 노동은 소유로 이어지고, 소유는 쾌락과 폭력을 내재한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농업경제는 원초적으로 구조적인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 그 폭력의 기억과 패턴이 곡식 안에 정보화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신통력으로 몸을 회복하는 것은 중생을 속이는 길. 고타마는 인간의 몸으로 해탈을 이루겠다는 비전을 세웠다. 만약 신들의 힘이 개입하면 도로 아미타불이다.
“존자여, 그대를 위하여 이 헌 옷을 빨겠사오니 원컨대 허락하소서.”
“모든 사문들은 남을 시켜서 옷을 빨지 않소. 누더기를 스스로 빠는 것이 우리 출가자들의 법이오.”
오! 붓다의 길은 진정 한 치의 방심도, 의존도 없구나! 나는 붓다의 일대기에서 이런 대목이 가장 흥미롭고 또 감동적이다. 대개 위인전은 일상적 디테일을 다 건너뛰고 위대한 성취만을 노래한다…그런데 붓다의 스토리는 뜻밖에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디테일이 살아 있다.
스승이란? 존경할 것이 없고, 공경할 것이 없는 생활이란 괴롭다.
어느 고명한 학자의 말처럼 사제지간이야말로 인간이 창안한 최고의 관계다.
그럼 이 고민에 대한 붓다의 답은 무엇일까?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이야말로 존경하고 공경하고 가까이에서 의지할 곳이다.”
자신이 깨달은 다르마, 곧 진리를 스승으로 삼는다! 아주 참신하고 전복적인 사유다.
“나의 법은 욕망 세계의 거센 물결을 역류해 거스르는 것. 오욕의 파도에 휩쓸린 중생은 나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리. 그러므로 나는 침묵하노라.”
붓다는 말한다. 단지 그리로 가는 길을 알려 줄 뿐, 거기로 데려다 줄 수는 없노라고.
팔정도. 여기서 포인트는 정正이다. 정이 무엇일까? 중中이다…중이란 양극단을 여의는 것이다. 그것은 절충도 평균도 아니다. 양극단을 떠난, 이원적 관점에서 벗어난 아주 낯설고 새로운 길을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중화문명의 고전인 <주역>의 핵심 역시 ‘중’과 ‘정’이다. 공통점은 ‘중’과 ‘정’은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시공간의 연기조건에서 매 순간 다시 생성되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고제, 집제, 멸제는 인도사상의 전통과 많은 부분이 겹친다. 하지만 이 도제는 실로 독창적이고 혁신적이다. 어떤 종교에서도, 또 어떤 사상도 이렇게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도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초전법륜. 그러니 “이 다섯 사람의 훌륭한 대가를 앞에 두고 처음으로 인류 세계에 펼치는 정법의 표현이 완전한 논리와 표현을 고루 갖춘 훌륭한 체계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늙음이 서럽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구도의 지평선은 끝이 없다. 끝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달려감 그 자체가 존재의 형식이 되는 것, 그것이 구도다…인위적인 목표…무한을 유한으로 끌어당기는 것. 자신도 나아가지 않을뿐더러 다른 이들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이것이 바로 모든 노쇠함의 공통점이다.(고지식함)
연기법. 신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무명. 무지의 핵심은 연기법, 곧 생명계의 상호의존성을 알지 못하는 것. 그 생명의 연기적 흐름을 벗어나 홀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무명이다.
제법무아. 일단 ‘나’라고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몸을 떠올린다. 몸이야말로 너무나 명확한 나의 실존적 형식 아닌가. 그럼 몸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우리 몸은 온갖 분비물의 온상이다…늙고 병들면 갖가지 오물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죽어 시체가 되면 악취를 풍기며 썩어 문드러진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변화와 실상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것을 그럴싸한 이미지로 장식한 다음 영원히 그 안에 머무르려 한다. 그 모습만이 진정한 실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망상이다. 실상이 아닌 망상.
어떤 종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아는 탐욕스럽고 해롭다. 그래서 참된 자아를 찾거나 아니면 자아를 더 높은 상태로 고양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온 것이다. 하지만 붓다는 자아라는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마침내 그것이 ‘만들어진 허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제법무아의 핵심이다.
디지털 시대…날마다 식욕과 성욕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동물적 단계를 벗어나기 위해 문명과 기술을 고도화했음에도 일상은 여전히 원초적 충동의 화염에 휩싸여 있다…붓다는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 지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했다…붓다의 여정을 함께해 보니 이젠 좀 알겠다. 열반은 어떤 조건에 연루되지 않는 절대적 행복, 곧 지복이다. 붓다는 그리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다름 아닌 자아라는 사실도. 그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바로 제법무아의 다르마임도.
붓다의 가르침에는 비밀스러움이 없었다…온 세상에 완전히 공개된 공공연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나 교육, 나아가 윤리학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더 중요하기는 승가가 출가자들의 조직이지만 세속과 단절된 삶을 지향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승가의 핵심은 욕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지 세속 자체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중생교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세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붓다는 스승이지 교주가 아니다…수행자들은 서로를 벗이라고 불렀다. 강력한 중심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는 조직…그런데 지금 우리가 만나는 불교는 제도종교다. 공동체라기보다는 종교적 시스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무미건조하고 경직된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의 네트워크를 생성시켜야 한다. 형식이 뭐가 됐든 스승과 벗, 그리고 지성(혹은 영성), 이 세 가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수련처가 도처에서 생겨나야 한다.
무아는 달리 표현하면 존재와 세계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이기적인 욕망에 복무할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그 마음은 타자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그 연결이 곧 생명이고 운동이다.
무아는 지혜의 광명이요, 자비의 원천이다.
길 위에서 펼쳐진 ‘언어의 향연’
무려 45년간의 설법…팔만 사천 법문…인류의 대스승 가운데 이토록 오랫동안 가르침을 펼친 스승은 없었다.
좋은 벗과 함께 가라! 좋은 스승, 좋은 벗, 좋은 후배가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도 수행의 전부이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45년간의 설법. 그 오랜 교화설법을 통해 그 교설내용이 기본적으로 아무 변화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확고부동한 깨달음, 일체지…다른 저자나 사상가있으면 당연히 사상의 추이부터 살펴보았을 텐데…붓다의 가르침은 어느 경전, 어느 페이지, 어느 대목에서 시작해도 바로 그 심오한 핵심으로 즉각 연결된다.
자등명법등명!
“아난다여, 승가조직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나는 모든 법을 다 설했다. 여래의 교법에는 따로 움켜쥔 비의 같은 건 없다. 나는 상가의 지도자가 아니다. 비구들이 나에게 의지한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오직 법을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춘다의 공양. 원망과 자책의 그물을 벗어나 더할 나위 없는 공덕과 축복의 순간으로 바뀐다.
그래서 든 생각. 붓다의 연기법이란 생로병사, 희노애락의 전 과정을 반전의 스토리로 만드는 능력이 아닐까?
아난다야, 너는 알아야 한다. 이처럼 향과 꽃과 풍악으로 여래를 공양하는 것은 여래를 참으로 공양하는 것이 아니리라…법을 잘 받아서 깊고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법과 계율에 따라 올바로 행하면, 그것을 일러 여래를 참으로 공양하는 것이라 하느리라.”
손오공을 능가하는 기술문명…결국 삶이건 문명이건 키워드는 파괴와 쾌락, 두 가지뿐이다. 문명의 혜택이 주는 기쁨과 평화는 도무지 누릴 줄 모른다. 또 기술의 이면에 있는 자연의 원리와 우주의 법칙을 어떻게 우리 삶에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이 진화할수록 인간의 탐진치는 더더욱 증장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하여, 다시 붓다다!
오라, 청년들이여!
우리 시대 청년들은 붓다를 좋아한다. 신기한 노릇이다. 대체 왜? 청춘은 청춘을 알아본다고, 붓다는 청춘이었다…그의 다르마는 늙지 않는다…당연한 말이지만, 청년들은 붓다를 잘 모른다. 불교의 원리와 역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럼에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게송에 격하게 반응한다…청년들이 이 아포리즘에 담긴 진리의 파동을 감지한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바야흐로 붓다와 청년들의 접속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자 고미숙의 ‘붓다 순례‘! 영원한 청년의 삶을 살다간 붓다의 일대기. ‘청춘이 청춘을 알아본다, 붓다는 청춘이었다…그의 다르마는 늙지 않는다.’ 기술문명이 가져다 주는 것은 ‘파괴와 쾌락’뿐인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세대들에게 참다운 스승이자 벗이 될 수 있는 청년 붓다의 삶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 책.
불교책은 읽으려다가 포기한 게 여러번입니다. 어려운 한자가 너무 많더군요. ㅠ 쉽게 읽을 수 있는 불교책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불교’보다 ‘부처님’에 관한 책으로 고미숙님의 ‘청년 붓다’나 자현 스님의 ‘붓다 순례’를 적극 추천해드리고 싶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