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올김용옥.
교회의 출발은 부활이다…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의 출발은 “인간 예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이 만약 그 시대에 예수의 삶에 관해 보다 치열한 성찰을 남겨놓았더라면 기독교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의 삶에 관해서는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바울에게 예수의 삶은 장사가 되질 않았다.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훌륭한 장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처한 “삶의 자리”였다.
재림은 부활의 필연적 귀결로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핵심으로 이미 자리잡았기 때문에 그 논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창조적인 교회활동을 벌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논리의 자가당착적 모순성, 한계성, 기만성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바울은 열차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 수는 없었다. 그리하면 자신의 선교의 모든 것이 사기, 거짓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 앞에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수식구가 있는데, 이것은 진실로 웃기는 표현이다. 이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성서도 없었고, 신약성서도 없었다…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표현양식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왜 예수를 죽였나 하는 구체적 사태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비역사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공적인 발표, 즉 선포의 형식이 이러한 것이다.
바울에게 예수는 추상이지만 갑돌이(마가)에게 예수는 구상이다. 추상은 지어낼 것이 논리밖에 없다. 그러나 구상은 논리가 아닌 “이야기story”를 지어낸다…삶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공감이란 쉬운 것이다. 이론적 각성은 어렵지만 감성적 교감은 쉬운 것이다. 철학적 저술을 읽고 깨닫는 것은 어렵지만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마가복음은 기본적으로 “스토리” 문학이지 “히스토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전기를 집필하려는 전기문학의 소이연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 아니다. 예수의 삶이 그 자체로 하나의 복음이라는 것을 선포하려는 새로운 개념의 유앙겔리온 문학이다.
남과 북을 위한 기도
미움과 증오의 언사들이 사랑과 호혜의 언어로 바뀌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분열을 획책하고 억압을 정당화하고
사리사욕을 책동하는 간교한 무리들을 벌하소서.
갈릴리 사람은 성전 그 자체를 거부한다
예수는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던 것이다…토라의 권위를 가지고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제식, 율법, 금기, 정화, 생활규칙, 제사, 안식일금기, 제사장계급의 존재, 성전,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예수의 사상은 오늘 21세기에도 실현하기 어려운 래디칼리즘이다.
마가의 용법에 가장 가깝게 오는 우리 표현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검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호시호 이내시호!때다! 때가! 오~ 나의 때다!
“회개하라(메타노에오)”의 원 뜻?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한 것은 구약이다. 새로운 계약, 즉 신학은 인간을 근원적으로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온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새로운, 정의로운 계약관계를 맺는 것이 신약이다…여하튼 “메타노니아”는 “과거에 지은 죄를 뉘우치라”는 “회개”의 의미가 아니고, “생각을 바꾸라”는 의미로 쓰인 것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