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률! 사랑의 폭력?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먼저 배풀라..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사랑의 윤리처럼 들이지만 인류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쳐온 기독교윤리의 병폐의 대표적 사례이다. 서구와 모든 제국주의적 행태가 이런 황금률로써 정당화되어 온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인간학적 사실은 아가페를 빙자한 사랑의 폭력에 대한 관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어다”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지어다”라는 부정형의 명제만이 인간세에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베풀지 않으면 해악은 최소화된다. 그러나 마구 베풀면 해악은 마구 극대화된다. 이 황금률의 긍정태와 부정태가 동일한 것처럼 착각하는 천박한 인식구조의 인간들에게는 과거 유자들의 점잖은 행태가 이해될 리 만무하다. “함”이 아니라 “하지 아니함”의 깊이가, 서구철학에만 젖어있는 천박한 인간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랑하지 마라!(개발하지만 말라!)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감화를 주면, 만물은 스스로 자기를 잘 가꾸어 나가는 데 오히려 그들의 참모습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사물들이 치우치게 되어 공존의 미덕을 상실한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지 아니 함”의 인류애이다.(탈개발!)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 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고 일컫는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이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신 분이실진저! 순임금께서는 무엇이든지 묻기를 좋아하셨고 비근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다. 사람들의 추한 면은 덮어주시고 좋은 면을 잘 드러내주시었다. 어느 상황이든지 그 양극단을 모두 고려하시어 그 중中을 백성에게 적용하시었다. 이것이 바로 그 분꼐서 순舜이 된신 까닭이로다!”

숨어있는 편벽한 것들을 들쑤셔내고, 괴이한 행동을 하면, 후세에 조술될 만큼 이름을 날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