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365쪽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전체를 통하여 말한 것은 제3세계가 존재해야 할 방식에 대한 원칙의 천명이었다…인간과 휴머니즘에 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면서 세계 도처에서 인간을 말살해온 서구 식민주의의 방식을 제3세계가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파농은 역설한다. 그리고 제3세계의 문제는 “다른 대륙의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설정되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선택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제3세계가 새로운 사회관계, 새로운 인간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 김종철, 대지의 상상력
죽음의 시계와 싸워가면서 파농은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했다. 누구에게 남기려 했던 것일까?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여 일어서라! 기아에 허덕이는 노예들이여 일어서라!”를 목청껏 외쳤던, 더이상 19세기 말 산업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가난한 시람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였다.
파농이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그는 출신과 행적을 통해서 20세기의 사건들을 검증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농은 삶과 사상에서 현대적 가치를 갖는다…지금처럼 경제의 세계화와 주체의 상실이 지배하는 시대에, 젊은 시절 파농이 외친 한 마디, 요컨대 그의 사상을 실천으로 끌어간 한 마디, “내 몸이여, 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주민의 지위가 아니라 이주민의 자리다. 원주민 대다수는 이주민의 농장을 원한다.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고 푸론 기능을 지닌 신체도 아닌 자연 상태의 폭력이므로 더 큰 폭력에 의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 중에서 선택해야 할 시기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 반대로 저개발국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의 특수한 가치관,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과 양식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구체적인 문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중에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대륙의 다른 사람들이 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말 그대로 제3세계의 창조물이다. 유럽에 가득 쌓인 부는 저개발 민족들에게서 강탈한 재산이다.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은 스포츠 경기장 대신 들판과 학교로 보내야 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저개발국에서 중요한 것은 300명의 인원이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게 아니라, 설사 그보다 시간이 두세 배 더 걸린다 하더라도 전 민중이 함께 계획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비록 대중에게 설명하는 데 시간은 걸리지만 노동자를 인간으로서 대우하는 데 ‘소비’한 그 시간은 계획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방관자는 겁쟁이이거나 반역자다.
만약 교량의 건설이 작업 참가자들의 자각을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 교량은 건설될 필요가 없고, 시민들은 그냥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편이 낫다.
대중에게 민족주의만을 메뉴로 제시하는 부르지아는 실패하여 총체적 난국에 처하게 된다…진정 민족적이 되려면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그리고 버려진 자들을 위해, 버려진 자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민족 정부는 국제적 평판에 신경쓰기 이전에 먼저 자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존엄성을 돌려주고, 그들의 마음을 사고, 그들을 참된 인간으로 만들고, 의식과 주권이 공존하는 인간적인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는 청사진과 본보기를 원한다.
유럽을 흉내내지 말자. 우리의 근육과 두뇌를 모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자. 유럽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
자연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다만 인간을 손상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말자는, 두뇌를 금세 파괴할 수 있는 리듬을 강요하지 말자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다. 따라잡는다는 구실로 인간을 압박한다든가, 자기자신이나 사생활로부터 소외시키거나, 인간을 파괴하고 죽이는 수단을 써서는 안된다.
자본주의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지평이 아니라고 생각한 우리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민중을 본질적으로 무능하고 순종해야 할 집단으로 정의하며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는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고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가 담겨있다. 착취자는 바뀔 수 있지만 피착취자는 언제나 민중일 뿐이라며!
정치인은 매일의 사건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와 달리 문화인은 역사를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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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꿈꾸던 강인한 ‘독립투사’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파농의 마지막 이야기. 친일청산과 식민주의의 그늘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해방과 독립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