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톨스토이.
몇십 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러한 무서운 변화는 그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남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지 않고 남을 신뢰하게 된 것은 자기를 믿고 삶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기를 믿는다면, 모든 문제는 언제나 안이한 쾌락만을 찾는 동물적인 자아기 아닌, 이와는 반대의 측면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타인을 믿는다면 그가 해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다 해결되어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선이라고 믿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악으로 보였고 이와는 반대로 악이라고 믿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투쟁에서 네흘류도프는 졌다…이러한 변화는…군에 복무하기 시작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시가 없는 신비주의란 미신에 지나지 않고, 신비주의가 없는 시란 산문과 마찬가지예요.”
그는 지난날 한때나마 솔직한 것을 자랑읋 삼고 언제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신조로 삼았으며 또 실로 성실했으나, 지금은 무서운 허위, 빈틈없는 허위-모든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허위- 속에 자신이 갇혀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이 젊은이를 이 같은 처지로 몰아 넣은 원인을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이 젊은이를 처벌함으로써 사건을 해결 지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 잔혹성과 부조리는 이런 경우 어느 쪽이 더 비중이 큰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둘 다 극한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이 전례에 참석한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이 의식이 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고 조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일 이 신앙이 없었다면 오늘날 그들이 거리낌없이 죄수들에게 가하는 일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성실하게 행할 수는 없었으리라. 아니, 도저히 할 수 없었으리라.
이제 새삼스러울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분명했다. 다만 이렇게 너무도 분명한 사실들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고 자기 역시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왔다는 것에 놀랄 뿐이었다.
“그렇게 한댔자 아무 소용 없을걸요. 그저 지금까지 했던 대로 하는 편이 저희에겐 오히려 고마운 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으나 남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이 집 하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자 자기 생각에 흡족해졌다.
“글쎄요, 공평하게 나눠줘야 하겠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결국 이 문제가 생각만큼 간단한 게 아니라는 거요.”
하지만 그렇게 법률을 적용할 수도 있고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듯이 검사나 판사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좌우된다면 재판 따위는 조금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네흘류도프에게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페테부르그는 보는 것마다 육감적이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게 깨끗하고 편리하게 정돈되어 있으나 도덕성에 대해 무관심한 그들의 생활은 꽤 나태해 보였다.
이러한 가정 생활은 관청 근무나 궁내 사무보다도 더욱 ‘그것이 아님’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그것이 아님’은 종교에 대한 그의 신조였다.
그러나 매일 부딪히는 실생활에서 자신의 확신과 위배되는 마찰을 겪으면서, 진실하고 강직한 그도 자기의 사소한 허위를 인정해야만 했다.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좋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좋지 않은 행동을 낳게 하는 생각이었다.
“산다는 게 도대체 뭡니까?”
“그건 좀 더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이지.”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의무를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직무와 의무만을 중요시하여 이를 다른 사람들의 어떤 요구보다도 제1의 조건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잠시라도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절대 깨닫지 못한다면, 사람에 대해 죄를 지으면서도 결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현대인들, 이를테면 기독교라든가 자선가, 지극히 선량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않고 죄를 짓게 하려면?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즉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을 지사나 교도소장, 장교나 경관이 되게끔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내가 미치광이인가, 아니면 내가 보고 있는 그 같은 짓들을 하는 그들이 미치광이인가?’
죄수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온갖 악덕은 인간이 인간에게 벌을 줄 수 있다는 착각에서 생긴 필연적인 결과이지 우발적으로 생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 건 자기를 믿을 줄 모르고 남만을 믿으려 하기 때문이지.
“법률이라고?”
“먼저 사람들한테서 토지며 재산을 뺏고 거기에 항의하는 자들을 죽여 놓고서는 살인하지 마라, 약탈하지 마라 하는 따위의 것이 법률이오. 그러기 전에 법률을 만들어야 할 게 아니오.”
네흘류도프는 이 같은 사상의 근원적인 구절을 성경에서 찾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감동을 주는 산상 설교를 읽는 동안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고 허황된 요구를 하는 그저 아름답고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실제로는 아주 명백하고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계율임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그것을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이는 실행가능하다.) 인간 사회는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갖게 되고 네흘류도프를 분노케 하던 온갖 폭행도 사라지며 인류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지상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날 밤부터 네흘류도프의 생활은 전혀 새로워졌다. 물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의 삶의 새로운 장이 그의 일생을 어떻게 끝맺어 줄는지는 미래만이 보여줄 것이다.
‘오늘의 시선으로 사물을 조명하면서 기나긴 숨결의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자신의 모든 구상을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고, 다시금 모든 것을 혼합시킬 수 있으며 이 혼합된 것 속에서 집필을 할 수 있다.’
https://photos.app.goo.gl/FqQLAD42DJpoHYrP9
한 권의 소설! 이야기, 문학작품이라기보단 사상서같은 책.
문학적 소설이라기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혁명을 부채질하는 불온한 사상서가 아니었을까싶다.
사람을 변화시킬….읽고 난 뒤 이미 다른 사람으로 ‘부활’시킬 수 있는 위대한 인문학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