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물에 대하여.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뿐이요,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것뿐이다.
사소한 문제에 견해를 표명하는건 쉽다…하지만 무한히 큰 것, 성스러운 것,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것이 결부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다. 그런 척도는 뇌가 감당하지 못하는 거다.
블랙홀을 본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질량이 태양의 수백만 배나 되기에 빛을 모조리 흢 해버리기 때문이다. 블랙홀을 감지하려면 그 너머를, 블랙홀 근처의 성운가 항성을 관측하는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모든 물, 모든 지표면, 전체 대기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도 너무 거대해서 모든 의미를 흡수해버린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유일한 방법은 그 너머로, 옆으로, 아래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것, 개인적이면서도 과학적인 태도로 신화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무슨 책인가요?”
“코덱스 레기우스예요. 우리말로는 ‘코눙스보크(왕의 책)’죠.”
겉모습은 볼품없었다. 내용과 영향력에 견주자면 금박에 반짝거려야 마땅했지만…
전율이 등골을 타고 일어났다…나는 700년도 더 전에 이 페이지에 글을 썼을 사람과 직접 접촉하고 있었다…우리가 아는 것은 대부분 이 책에서 나왔다.이 사본은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자 신앙과 예술의 샘이다. 여기에서 현대무용과 데스메탈 밴드 헐리우드의 현대 고전 영화까지 나왔다.
“262년?”
“상상해보렴.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는 누군가의 시간이야…”
그들은 산악 스포츠를 즐긴 첫 세대였다. 당시에는 스키 시설이 아주 원시적이어서 악천후에도 산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다…그런데도 그 시기를 산장에서 보낸 사람들은 누구나 그때가 행복의 정점이었다고 말한다.
거대한 빙하의 돔, 침묵의 묵직한 속삭임….당신은 낭랑한 종처럼 떨며 신의 광대함으로 만물을 아우르는 침묵에 빠져들어 그와 하나가 된다.
전쟁은 끝났어도 생산은 원래 속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알루미늄 산업은 일회용 소비경제의 부상에서 탈출구를 찾았다…이런 사고방식은 귀중한 것을 귀히 여기고 아무것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밥을 남기지 않고 물건을 고쳐 쓰고 뭐든 활용하는 법을 배운 앞선 세대의 가치와 어긋났다.
포장재 산업과 소비사회는 무한한 원자재 수요를 창출하여 전세계 미개척지를 야금야금 집어삼겼다.
헬기의 정신에 입각하여 황무지에서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겐 환경 극단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어떻게 헬기는 아이슬란드에 고난과 굶주림이 만연하던 시절에 자연에 대해 이토록 숭고한 김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우리 세대는 왜 헬기처럼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가상의 경제 용어와 합리주의 담론에 말문이 막혔을까?
헬기가 신의 광대함으로 민물을 아우르는 침묵을 발견한 것은 하나의 작은 장소에서였는데, 우리 모두가 들어마시는 대기에 대해, 인류가 변화시키는 대기 조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어떤 단어를 동원해야 할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기후변화 보고서…사람들에게 이것은 당연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집무실에 걸린 미술품 하나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더 쉬웠다. 말하자면 그 모든 의견들은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잡음이었다.
내 목숨이 위험에 처하고 나의 땅과 후손이 위험에 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것, 이건 의무가 아닐까?
“그건 과학자들이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과학 소통의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통역자가 없으면 그들은 문외한에게 말하는 셈입니다…그래프와 도표를 저희가 발표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숫자와 그래프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야기는 이해하잖아요. 선생께서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단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저연스러운 일이라고…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갼단한 문제가 아니다. 전혀. 이를테면 ‘지구온난화’ 같은 단어들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기면서 훨씬 사소한 단어들에는 쉽게 발끈한다.
그 시기 내내 자유와 독립을 갈망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대다수 사람들은 시대정신에 무심했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데 급급했다. 사람들은 당대의 지배 언어와 권력체계에 갇힌 채 자신의 현실에 안주했다.
이렇듯 해수 산성화는 우리를 스쳐지나가버린 개념 중 하나다. 지난 3000만에서 5000만 년을 통틀어 우리 지구의 화학 조성 및 구조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변화 중 하나인데도 말이다.
이 문장에 담긴 메시지는 두려움을 자아내야 마땅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암호나 마찬가지다. 이런 구절들은 정치인의 정책에,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 말 속에는 거짓이 전혀 없으며
말로써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사람,
그를 일컬어 진정한 브라만이라 한다.
그뷔드뮌뒤르 파우들은 기술, 문화,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꿨다. 사람들이 현대 과학을 이용하여 자연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저는 어딜 가든 인류 차원에서 이야기합니다. 티베트인에 국한하지 않습니다….오늘날의 현실을 보건대 우리에게는 지구적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낡은 관념,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명백한 구별은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이젠 비현실적입니다. 이 세상은 긴밀한 상호 의존으로 역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지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학교는 아이들이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학교 체제와 경제계가 과학에 적응하지 않고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면 어떤 교육도 무의미하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한 가지 패션이 유행하는 것만으로 동생들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시대다.
우리의 소비 습관은 자연에 미치는 효과 면에서 화산에 맞먹고 우리의 패션 유행은 지반 이동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욕망은 지진과 같다.
문제는 인간이 한계를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며 자신이 도를 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대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논을 넓히는 것은 쇼핑몰이나 놀이공원을 지으려고 물고기와 꽃과 번식지가 있는 연못을 메우는 것과 같지 않다.
많은 분야에서 변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감안하면 20세기 전체 기간보다 지난 10년간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모든 플라스틱의 절반이 2000년 이후에 생산되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빙하에서 찍은 영상을 보다가 할머니의 모습을 더 찍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할머니의 젊음은 한때뿐이지만 빙하와 풍경은 언제든 담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틀렸다. 알고 보니 빙하는 사람만큼이나 덧없는 존재였다.
잣대….예술은 매출과 수익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한다. 교육과 과학은 상품과 고용을 얼마나 산출하느냐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빙하는 일종의 얼음 사본으로, 나이테나 퇴적 광산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꼭 들어맞았다.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너무나 거대한 문제여서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지구적 문제’들? 이해할 수 있다면 바로 ‘당장’ 행동에 나섰어야 정상이랄 수 있는 지구온난화! 아직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음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