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과 운명. 이정우. 207쪽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 때문에 새로운 위험에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기괴한 등장 인물들, 갖가지 신기한 기계장치들, 환상적인 도시, 신나는 액션 등. 그래서 대부분의 사이버펑크들은 시시한 오락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볼 때 우리는 때때로 이 장르에서 놀라울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문제의식과 사유들을 발견하곤 한다.

영화란 참 묘하다. 잔인한 장면, 폐허가 된 도시 등, 묘사되는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영상에 비치는 한 아름다워 보이니 말이다.
영화란 모든 것을 심미적 환상 속으로 빨아들여 관음증에 중독된 관객들에게 투엉한다. 어쩌면 영화란 그 자체 일종의 시청각적 마약일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인간의 행위가 빚어내는 ‘되기’이다. 우리는 ‘이다’로서 존재하기보다 ‘되다’로서 존재한다. (doing being?!)
사람은 오직 기억에 위해서만 개인이라 할 수 있지…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화를 가능케 했을 때, 당신네들은 그 의미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어.
“복제는 어디까지나 복제에 지나지 않아….무엇보다 복제로써는 개성이나 다양성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지.”
복제는 단번에 어떤 존재를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그 존재에게 삶의 다채로움을 입힐 수는 없다. 탈물질성은 자유롭지만 공허하고, 물질성은 제한받지만 구체적이다.
생명의 역사란 무엇인가? 진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명체가 “보다 더 존재하기 위해서 계속 복잡다양화해가며 때로는 그것을 버린다”는 점이다.
진리와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
진리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할 때 성립하지만, 진실은 볼 수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이게 할 때 성립한다…진리는 범상한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비범한 능력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것이지만, 진실은 누구나 보려면 볼 수 있는 데도 보지 못하는 것을 그 진실을 본 사람이 알려주는 것이다.
마틴은 앤드류를 ‘유니크한’ 존재로 보지만, 제작자는 그것을 ‘비정상’으로 받아들인다. 열린 마음에게 차이로 보이는 것이 닫힌 마음에게는 동일자를 벗어나는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때로 진실을 본 사람은 고난의 길에 처한다…진실읔 때로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대가를 요구한다…그러나 진실을 본 사람에게는 언제나 동지가 있게 마련이고, 이 동지들이 피땀 흘리면서 지킨 그 진실은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퍼져나간다.
진실을 지킨다는 것은 곧 저항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아니 어쩌면 다행히도 우리의 삶은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모순과 질곡 한가운데서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명이란 없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에 던지는 회고적 눈길일 뿐이다.

“자네가 노예라는 사실이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네도 예속과 더불어 태어났어…바로 자네의 마음을 위해 설계된 감옥에서 말이야.”
인간은 테크놀러지를 발견함으로써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고, 서로간에 피나는 전쟁을거듭해왔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맞닥뜨려야 할 가장 강력한 적운 테크놀로지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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