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자의 추방. 한병철.
불과 몇 개의 문장들로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사고의 구조물을 무너뜨린다.
진정성의 테러.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공허감을 강화한다…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성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들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고립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 광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청하지 않는다.
빈지 워칭binge watching,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
이는 어떠한 시간 제힌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 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소셜미디어..이 소식들은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누구도 가리키지 않는다….타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 소통은 정보들의 가속화된 교환으로 전락한다. 이런 소통은 어떠한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로지 연결만 낳을 뿐이다. 그것은 이웃이 없는, 어떠한 친근함의 가까움도 없는 소통이다…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착취는 더 이상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착취자로서의 타인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과잉소통.
소통의 소음은 우리를 덜 고독하게 해주지 않는다…과잉소통은 너뿐만 아니라 가까움도 파괴한다. 관계가 연결로 대체된다. 간격 없음이 가까움도 몰아낸다. 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침묵은 언어지만, 과잉소통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디지털 매체는 시선 없는 매체…이 때문에 디지털 판옵티콘은 아날로그 판옵티콘보다 훨씬 많이, 나아가 훨씬 깊이 본다…빅데이터에는 시선이 전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억업적인 시선이 사라짐에 따라 기만적인 자유의 감정이 생겨난다…감시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
시는 타자와의 대화를 추구한다.
같은 것의 감옥으로부터의 구원은 타자로부터 온다….우리는 이런 타자를 배척하고 혐오할 것이 아니라, 환대로서 맞아야 한다…한 문명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게 해주는 기준이 바로 환대다.
저자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매체로서 예술과 철학에 희망을 건다. 예술은 세상을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으로 인식하고 서술한다…세상을 다르게 보고, 그 결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다.
투명성과 과잉소통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내면성을 앗아간다. 실로 우리는 이 내면성을 자발적으로 양도하고 우리 자신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내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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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인터넷 글로벌 세상, 초연결시대의 역설! 다양성을 가장한 획일화된 신자유주의 소비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긴 철학자 한병철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