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353쪽
The Tyranny of Merit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기회의 평등’은 기껏해야 부분적 이상, 누구나 주어진 ‘조건에 관계없이’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건의 평등’이 필요하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학력이 떨어지는 자들보다 ‘가장 뛰어나고 가장 똑똑한 자들’이 정치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주의적 교만에 기초한 허구다.
오만과 분노의 유독한 혼합물은 트럼프를 백악관까지 밀어 올렸다…이 책은 그 과정을 살피면서, 공동선의 정치를 찾아 나서기 위해 생각을 모아보는 책이다.
그러한 입학이 헌신과 노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행운은?
행크 아런 이야기…오직 홈런을 때려야만 벗어날 수 있는 인종주의의 부정의한 시스템을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의 평등’이다.
아메리칸 드림? 태생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질서의 꿈이다.
미국 의회도서관.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자유주의적 섭리론.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 성공은 구원의, 또는 세속의 언어로는 선함의 증표가 된다.
도덕 세계의 궤적이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도덕 세계의 궤적은 정의를 향해 휘어질지도, 또는 아닐지도 모른다.
고급 학력에 대한 선호는 오바마의 임기 내내 이어졌다….금융위기를 맞이해 월스트리트의 편을 들어주도록 함으로써 그들은 은행들이 담보도 없이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도록 했다. 덕분에 민주당은 많은 노동자들의 눈 밖에 났다. 그리고 트럼프는 백악관에 갈 꽃길을 얻었다.
이분법적 가치 비교평가의 ‘스마트하냐 둔하냐’는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 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해지기 위해 할 일”이라는 말은 언제나 신중한, 또는 손익계산적인 합리성과 관련되며 도덕적 고려와는 무관하다.
엘리트는 그들의 ‘스마트한 정책’에 대해 그 당파성을 모를 뿐 아니라, 입이 닳도록 “스마트하다”, “우둔하다”를 말함으로써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도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마크롱 인기 하락의 원인? “아마 우리는 너무 지적이고, 너무 섬세했던 거죠.”
능력주의의 승리에 따른 피해. 고학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줄어든 것. 특권과 능력주의 오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교육만이 불평등의 해답이라 하는 사회적 상승 담론은 부분적으로 비난받는다.(제로섬 게임의 경쟁 원리의 한계?)
….그 결과 정치적 반격을 겪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세계화. 소득과 부의 불평등.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소비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공동선…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 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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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세상을 위한 ‘기회의 평등’? 능력주의에 기반한 기회의 평등은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성공과 출세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고, 누구나 어떤 조건에 있건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야말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의 요건임을 일깨워주는 민주시민을 위한 교양서로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