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372쪽
(fr. 소립자)
자연과학이란 실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로 그 실험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실험의 의미에 관해서 서로 숙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토론이 이 책의 주요내용이 되고 있으며, 과학은 토론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질 것입니다…이러한 점에서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이 토론에 참여해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표현수단의 선택의 자유가 바로 성과과 풍부한 신천지가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원자물리학…원자와 그 안전성에 대한 이해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던 난점과 내부의 모순들은 도대체 완화되거나 제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이전의 물리학으로부터 원자의 영역으로 도입했던 그 개념과 상들이 반은 옳고 반은 옳지 않다는 점에 익숙해져갔으며, 따라서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엄밀한 척도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도 익숙해졌다.
당신도 알다시피 관찰이란 일반적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입니다.
현재까지 우리들은 어떠한 언어로 원자내의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실질적인 신세계는 어느 결정적인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과학이 의존하고 있었던 그 토대를 박차버리고, 말하자면 허공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을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던 어느 날 밤, 극복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한 내게는 혹시 우리가 문제를 잘못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아인슈타인의 말, 즉 ‘이론이 비로소 사람들이 무엇을 볼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사랑하는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나는 자네에 대하여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 자네는 마치 자네의 상대성이론에 반대했던 사람들처럼 이 새로운 양자이론에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불확정성의원리
까닭에 나는 사람들이 모든 절대성의 주장을 포기할 것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어떤 난관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확립되어 있는 것을 모두 뒤집어 엎으려는 짓은 자연과학에서는 다만 무비판적인 반미치광이 같은 광신자들만이 시도하고 있을 뿐입니다…역사사으로 보더라도 영속적인 혁명은 다만 좁게 범위가 한정된 문제만을 해결하고, 되도록 적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환상이 현실에 의해서 무참히도 짓밟히고 말았는데도 학문에 종사하는 일이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좀더 솔직하고 비판적인 판단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따라서 나는 경제적인 면보다는 학문에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즉 비판적 사고를 길러줄 수 있는 학문의 교육적인 측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자가 어찌하여 이 책의 표제를 ‘부분과 전체’라고 붙였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서 역자의 후기를 마칠까 한다.
최근의 과학기술의 발달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발달은 도리 없이 학문의 세분화 및 전문화를 가져오고 말았다…같은 분양에 종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잘 모를 정도로 세분화되어 가고 있다…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은 전체를 보는 눈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분만을 응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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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대화로 풀어낸 천재과학자의 자서전 이야기 속에 담긴 과학과 철학적 사유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책의 제목 ‘부분과 전체’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자세계를 통해 펼쳐내는 거대한 우주적 사고가 과학적 사고를 넘어 통섭의 지혜를 이어가는 위대한 과학자의 철학적 사고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