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270쪽.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은 별빛을 바라볼 줄 안다”-오스카 와일드
우리 스스로가 별이 될 수는 없지만, 시선을 시궁창의 아래가 아니라 위에다 둘 수는 있다.
대학의 사막화가 한창 진행 중인 오늘날, 무성한 대학 입시 논의만큼이나 이제 대학에 가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성숙한 시민으로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이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모순, 긴장, 혹은 혼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제로 논술문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과 긴장과 혼란을 직시하되,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공부에 매진해본 사람만이 재대로 쉴 수 있습니다….늘 누워 있는 사람은 걷는 일조차 고역이겠죠…평소에 어려운 책을 읽는 이에게 어지간한 독서는 다 휴식이 됩니다.
세상은 부정확하고 조리에 맞지 않는 말들이 넘실대는 홍해와 같다. 오해와 몰이해의 위험으로 가득한 홍해를 가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의사소통의 땅으로 건너가려면,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를 가능한 한 날카롭게 벼려내어 의미의 피륙을 재단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관심을 과거의 사상에 시대착오적으로 투사하지 말고,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한껏 고려해야 한다…현실 사회 속에서 고기와 작은 고기가 빚는 혼란, 스시와 회전 스시가 일으키는 모순은 단순히 논리학을 통해 해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모순에 이르게 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일정한 경험적 지식이 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해 모순 없는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공부하는 이가 할 일은, 이 모순된 현실을 모순이 없는 것처럼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모순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이들에 대해 모순 없거나 적은 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을 때, 나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희열을 느낀다.
말뜻의 사회적 함의. 착함이 곧 무능함의 동의어가 되어가는 현상, 이것은 한국 사회가 흘러가는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것일까.
공부하는 삶.
무용해 보이는 것에 대한 열정.
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 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의도하지 않은 선물? 공부가 즉각적인 쓸모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묘한 ‘간지’가 난다는 것이다…정신의 척추 기립근이야말로 유용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21세기, 무용한 공부에 매진하는 이에게 허여된 마지막 기대효과 같은 것이다…이처럼 무용해 보이는 공부가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공부가 죽기보다 하기 싫을 것이다…공부가 하기 싫은 나머지, 공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일을 그는 해낼 수 있게 된다. 숨막히는 조직 생활도 해낼 수 있다. 심지어 매일 출근도 해낼 수 있다.
외국어를 배워보아야,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만큼 생각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공부와 체력. 헛소리를 일삼는 상대에게 자비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 저 사람이 체력이 달려서 저러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체력이 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집중력이 떨어진다. 사고력이 저하된다.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헛소리를 하게 된다.
체력이 달리면 정신력으로? 정신력도 한정 자원이다…운동은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유용하다…그뿐이랴. 운동은 사고능력과 관련된 백질 부위의 수축을 막아 두뇌를 건강하게 만들기까지 한다…공부에 있어 이처럼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실버스터 스탤론 같은 근육 덩어리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저들이야말로 학문에 적합한 인재인데!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덧없는 삶을 사는 우리는 왜 애써/ 많은 것을 추구할까? 어찌 낯선 태양이/ 끓는 곳을 찾아갈까? 고향을 등진다고/ 자신마저 등질 수 있을까?”
노년이 되면 체력이 현격히 저하된다. 그때 가서 새삼 구해야 할 나라 같은 게 있다면 너무 피곤할 것 같다. 꾸준히 공부해왔으면, 공부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스키 상, 당신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나쓰메 소세키 중에서 누가 좋습니까”라고 묻자, 우스카 상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나쓰메 소세키가 좋습니다. 두 사람은 차원이 다릅니다.”
교육자가 될 바에야, 대학생보다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더 보람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대학생에 비해 중•고등학생이 아무래도 가소성이 더 있는 존재일 테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일견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생각과 경험들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공부와 능동성.
자신을 피해자나 약자로 자리매김하는 한 능동적인 태도를 갖기는 쉽지 않다…공부에는 두뇌와 체력에 못지않게 배우고자 하는 적극성 혹은 지발성이 중요하다…공부해도 지식이 잘 안 찌는 체질이 있다. 지발성이 장착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지식을 퍼먹어도 머리에 많은 것이 남지 않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알고 보면, 공부 역시 맥주 마시는 일 못지않게 쾌락적인 일이다.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면 공부하는 순간순간이 쾌락이니, 적극적이 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특히 목적 없는 배움이야말로 즐거운 법…
모범생의 자세로만은 부족하다…그 어떤 선택지도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좀 더 창의적이 되라고!
생각을 하나만 해서는 창의적이 될 수 없다.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을 해야 한다. 잡념이 많은 인간은 일단 창의적일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셈이다…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생각과 경험들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용기뿐만 아니라 유연성도 필요하다. 용기만 있을 뿐 유연성이 부족하면 큰 각도로 꺽어서 새로운 길을 가기 어렵다.
책을 왜 읽는가?
“독서는 제게 유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엄청나게 무식하지만 아주 건강한 눈알을 가진 채로 늙어 죽고 싶은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게 좋다.
연구 질문이 없는 연구는 조타수가 없는 선박과 같다…독자 역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토론의 목적은 다양성을 무한정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여 좀 더 나은 지점으로 나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과 타당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상식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해내는 사람은 섹시하다…축적된 경험적 지식, 논리적 분석력, 발랄한 상상력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 것들을 생략한 채 서둘러 섹시해지려고 하는 학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점쟁이의 길이다…반증 가능성이 없는 예언의 언어를 남발하는…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계획의 특징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저자 역시 독자가 책을 덮었을 때, 독자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욕망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고 있는 데서 느껴지는 에너지. 화려한 수사를 구사할 능력이 없어서 간신히 써낸 건조한 문장이 아니라 충분히 화려한 수사를 구사할 수 있는 데도 논술문이라는 성격 때문에 자제하며 써낸 문장이 발산하는 매력이라는 것이 있다.
결함으로 인해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그 결함을 인정할 때 뿐이다.
지성에 기반한 토론은 쉽지 않다…먼저, 자기 견해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토론이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아 만나서 하는 것. 견해가 없으면 토론이 아예 시작될 수도 없다…토론을 통한 설득이란, 상대가 상당히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람인 경우에나 가능하다.
난장판의 경우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사회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다름 아닌 토론자들이 지나치게 과묵한 경우다…일부 학생들은 토론 시간에만 조용할 뿐, 술자리에 가서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쟁이가 된다는 제보를 받고서. 오늘도 나는 알코올 함량이 높은 초콜릿을 찾아 상점을 헤맨다.
만약 배움의 현장이 무임승차자들로 인해 초토화되어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까?…집단적 이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집단적인 이득으로부터 배제된다는 위협이 느껴지자 않는 한 자발적으로 집단적인 이득에 기여할 인샌티브는 없다는 것이다.
배움의 순간..의외의 순간에 온다!
초유의 온라인 강의….사실 콘텐트 전달은 책으로 하면 된다. 강의는 서로 얘기를 나누고, 헛소리도 하고,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얘기로 번지는 과정에서 더 배우는 면이 있지 않나…지금 환경에서 가장 큰 도전은 그런 게 어려워졌다는 점이다.’학교란 무엇인가’…’언택트’가 ‘뉴노멀’이 된다고 해도, 공연, 전시 등 전통적인 오프라인 콘텐트에는 온라인 체험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공간의 마법’이 있다.
다양한 매체에 방대한 지식을 쏟아내고 있는 걸 보면 ‘공부는 언제하나’ 싶다. 이에 대해 그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쭉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왔다”며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읽고 쓰고 있기에 가능하다. 다른 분들도 책과 거리를 좁히고 사회적 거리를 두면 될 것 같다”라고 했다.
공부란? 학창 시절에나 졸업한 이후에나 좋은 배움의 기회를 목마른 사람처럼 찾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휴식의 초심자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어딘가 몰입할 대상을 찾고, 그러지 못할 때 불안해지거나, 권태를 느끼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기보다는 산책을 권합니다…그 휴식은 창조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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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시민사회를 위해선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보다 먼저 필요한 질문이 ‘공부는 언제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이에 대한 저자의 ‘명쾌한(!)’ 해답,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쭉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왔다”는 이야기에 가장 먼저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