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박홍규. 324쪽
‘에세’를 읽으며 웃다
몽테뉴는 16세기에 포도주로 유명한 보르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유명한 보르도 포도주보다 몽테뉴가 좋다. 그를 읽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 못난 구석이 있는 그대로 나온다.”

이렇듯 16세기의 몽테뉴는 후세 선구자들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수필의 시조라는 몽테뉴의 「에세」는 자기 탐구 또는 삶의 고백록이다…그것도 갖가지 무능의 고백.그러나 그는 결코 무능하지 않다.
몽테뉴를 수필가라 부르는 사람도 없다. 그에 대한 호칭은 모럴리스트다. 모럴리스트를 뭐라 번역할까? 도덕주의자? 천만의 말씀이다….차라리 감정주의자라 번역하는 편이…무엇보다 모럴리스트의 특징은 그 웃음에 있다…몽테뉴처럼 웃는 모럴리스트는 도덕 선생이 아니다…모럴리스트는 그 모순된 자기 모습을 잘 알고 그것을 쓴웃음으로 나타낸다.
「에세」는 명확하고 테두리가 분명한 기승전결의 논리를 요구하거나 매사에 결론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잡다하고 통일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몽테뉴 사상의 특징인 다양성과 유연성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며 다양한 운동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복종하고 자신의 경향에 사로잡혀,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것을 비틀어 보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자신의 노예가 될 뿐이다.
만일 나의 혼이 확실히 대지를 밟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저것 시도하지는 않으리라. 나의 생각도 고정되리라. 그러나 나의 혼은 언제나 배움과 시련 속에 있다.
크세주.
몽테뉴가 말하는 에세는 단적으로 말해 ‘주체적인 판단의 시도’이다…자신의 비판적인 사고나 주장이다….오로지 한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해 썼을 뿐이다…그래서 나는 이상적인 글쓰기의 모범으로 「에세」를 선택했다.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하는 정도의 해설도 없이 우리에게 「에세」를 읽으라고 하는 것은 망망대해에 「에세」와 우리를 내던지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 그런 해설도 없이 번역만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독서를 권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읽지 말라고 말리는 것과 같다.
모든 은거지에는 산책로가 필요하다. 내 생각은 앉아 있으면 잠들어 버린다. 나의 정신은 다리가 그것을 흔들지 않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그곳을 완전히 지배하고, 이 좁은 장소 한 곳만은 부부, 자식, 공적인 공동생활로부터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자신의 집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만 소용이 있으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갖지 않는 사람은 비참하다!
‘재미로 하는 공부’, ‘결코 소득을 위해’ 하지 않는, ‘나를 위한’,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즐거움과 소일’의 공부가 그의 공부의 전부이다. 아니, 삶의 전부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뿐이다.
내 집에 있을 때조차, 식구도 많고 손님도 많은 이곳에서조차도 나는 외롭다. 나는 여기서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내가 먼저 나서서 사귀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나를 위해서나 남들을 위해서나 유례없는 자유를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결코 자신만의 재미로 삼지 않는다. 즉 자신의 고백이 시공을 넘어 타인과의 대화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세」는 완벽하게 작가 자신과 일치하는 책이 된다.
고독한 죽음. 그는 사럼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는 것을 혐오한다고 썼다.
결국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공포요, 경악이다. 죽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땅 속에 묻혀 있다.
몽테뉴는 자유로운 삶과 평등한 죽음을 이루기 위해 고독한 생활을 택했다…생활 자체의 자유와 평등 없이 정치, 경제, 사회의 자유와 평등이 가능할까?
몽테뉴의 책읽기. 글을 읽다가 어려운 구절에 부딪히면 나는 손톱만 깨물고 있지, 뭔가를 애써 꾸미려 드는 일은 하지 않는다….첫 번째 부딪혀 보아 이해되지 않는 것을 고집하다가는 더욱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너무 긴장하거나 일을 계속하면, 판단력이 흐리멍텅해져 우울해지고 피로해진다…어떤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책을 집어든다.
1572년부터, 그가 죽는 1592년까지 20년간 쓰여졌다. 하나의 책이 이렇게 오랫동안 쓰여진 것은 유례가 없다…”나는 덧붙여 갈 뿐 무엇 하나 고치지는 않는다”
그 고독이란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로부터의 고독…따라서 그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특히 변화를 의식했다…세계는 영원한 변동의 장소이고, 모든 것이 그곳에서 끊임없이 변동하고 있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몽테뉴가 자기 주변의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에서부터 변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나는 본질을 그리지 않고, 변화를 그린다.”
‘명예의 법’과 ‘정의의 법’이라는, 아주 반대되는 법….전자는 무안을 당하고 참는 때에, 후자는 그런 경우에 보복하는 경우 똑같이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이보다 더 야만적인 일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우리는 재판관들에게 제멋대로 해석하고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주었기 때문에, 전례 없이 강력하고 방자한 자유가 지배했다….가장 바람직한 법은 법조문이 가장 적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 법이다. 아니, 우리처럼 이렇게 많은 법을 가질 바에는 차라리 어떤 법도 가지지 않는 편이 나을 듯하다.
여행은 유익한 수양이다. 영혼은 미지의 새로운 것에 눈을 뜨고 부단한 훈련을 받는다…생활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의 생활 모습이 각각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사람들의 의견이나 습관을 언제나 지켜보고, 우리 인간의 본성이 정말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 것을 맛보는 것 이상으로 좋은 학교는 없다.
몽테뉴가 일부러 고독하려 애썼다고 했다…그것은 사실 그 시대에 저항한 탓이다.
몽테뉴의 시대는 전쟁의 시대다…몽테뉴가 59세로 사망한 지 6년 뒤에 끝났다. 36년간이나 계속된 전쟁이었다…종교전쟁…왜 이런 폭력적 증오가 들끓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의 다양성에 익숙하지 않아 그것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적개심만큼 더 심한 것도 없다.
「에세」의 시작과 끝은 ‘인간’이라는 주제이다…실로 ‘인간’이란 놀라울 정도로 공허하고 다양하며 변하기 쉬운 대상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변치않는 하나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자유의사에 따라 명예로운 조형자이자 형성자’로서 네가 원하는 형태를 네 자신이 만들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짐승처럼…전락할 수도…신 같은 존재로 드높아질 수도 있다.
위 글을 썼을 때 미란돌라의 나이는 23세...교황청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31세에 독살당해 죽었다. 반면 39세의 몽테뉴는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자신이 주위에서 보고 책에서 읽은 인간에 대한 냉정한 탐구로부터 현실 인간의 공허함을 읽어낸다.
인간을 이렇게 다양한 가능성의 존재로 파악한 점이야말로 르네상스인적 사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은 감각에서 시작하고 그것으로 돌아간다…그러나 몽테뉴는 인간의 감각은 자연의 감각에 비해 대단히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가령 우리는 자석의 자력을 우리의 손으로 느낄 수 없고, 꿀벌이 나는 것처럼 날아다니지도 못한다…감각의 결여…그 때문에 어떤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해 무지한 것이 진실이 아닐까? 몽테뉴는 감각이 인간의 이성을 속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기만이라고 본다.
야만에 대한 새로운 판단. “관습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을 이성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믿게 된다.”
몽테뉴는 교육-도덕교육-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행을 권유했다…자신에게 당면한 한계를 넘어 보는 것을, 그리고 우리들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의견이나 관습의 실제를 보기나 관념 이외는 진실과 이성의 기준이란 것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하다…야만이나 미개가 아니라 야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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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동안 쓰여진 책,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만나는 몽테뉴! 책은 멀리서 찾아온 벗, 책을 통해 참으로 멀리서 찾아온 몽테뉴의 이야기. 고독한 자유인이었던 몽테뉴, 지금 다시 세상에 온다 해도 여전히 다시 고독 속 자유를 찾아가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