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디언 아니키 민주주의. 박홍규. 315쪽
‘지리상의 발견’이 아닌 ‘아메리카 침략’의 역사 이야기
이 책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오기 몇백 년 전부터 인디언이 아나키 민주주의를 했고, 그것이 1791년 미국 헌법을 비롯한 미국 민주주의에 반영되었음은 물론 16세기부터 지금까지 근현대 민주주의, 특히 그 사상과 사회운동과 예술의 기초가 되어 왔으나, 동시에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자체는 근현대 사상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는 모순된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건너갔을 지도 모르는 인디언이 오랫동안 아나키 민주주의를 했고, 그것이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근대 사상, 예술, 사회운동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비록 인디언은 멸망했고 아나키 민주주의도 사라졌지만 그들의 삶과 아나키 민주주의는 자유-자치-자연이라는 인류사의 중요한 가치를 가장 먼저 구현한 것으로 남아 있다.
아나키란 흔히 ‘무정부’로 번역된다. 그러나...이는 가족이나 마을이나 사회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가족, 무마을, 무사회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가족이나 마을이나 사회는 인간이 사는 어떤 곳에도 존재한다…(아나키즘=노자의 무위이화無爲而化!)
만일 어떤 권위나 권력도 없다면, 그게 아나키 민주주의다.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는 질서나 법이나 조화나 단결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질서, 무법, 무조화, 무단결이 결코 아니다…가족, 마을, 사회를 기본 토대로 삼아 형성되고 그 각각의 자립과 자유, 자족과 자치를 위한 질서, 법, 조화, 단결을 중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을 존중한다.
인디언 문화는 그야말로 아나키즘으로서 당시 미국에 형성된 프론티어 개념과는 상반된 반미국적인 것이었다.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소유물”이야기를 파괴당하면 인디언은 무력하게 될 수밖에 없으나, 이야기는 살아남아 인디언의 자기의식을 형성한다…
사람들이 흔히 아나키를 무정부라 이해함은 그 내용의 일부에 불과하고,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유와 평등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번아나키다.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부자유와 불평등이 인류의 현실이다.
인디언에 대한 기록…「유토피아」…만일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모습이 알려지지 않었더라면 그런 책은 쓰이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 특유의 정치적 이상은 인디언의 풍부한 정치적 전통에서 생겼다.
인디언과 백인의 투쟁의 초점은 땅이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땅을 둘러싼 소유권 주장 이전에 소유권의 개념 유무와 관련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자유인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한 뼘의 땅도 개인이 소유할 수 없으며,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무소유는 인디언 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이는 소유를 핵심으로 하는 서양 법과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콜럼버스가 어떻게 아메리카로 갔는가? 우리는 그것이 2천 년에 걸친 유대인 유랑의 비참한 역사의 일부와 관련된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의 배가, 수백 년간 살았던 스페인 땅을 영원히 떠나야 하는 유대인 유랑민들의 배와 함께 바다로 떠났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누구나 이름을 아는 콜럼버스는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콜럼버스 항해록]을 읽어보면 그는 아메이카가 아닌 일본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아니라 아메리카에 도착하게 되었지만, 정말 일본에 갔다면 한반도나 중국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저 아메리가 대륙의 잉카니 하는 여러 제국을 멸망시켰듯이 일본도, 조선도, 어쩌면 중국까지도 멸망시켰으리라. 그리고 지금 우리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는 라틴 아메리카의 혼혈인 메스티조처럼 서양인과의 혼혈로 가득하리라.
기독교가 퍼진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종교침략’이라고 함이 옳다. 즉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토지침략’에 의한 ‘종교침략’이다. 어디 그뿐인가? 르네상스도 ‘문화침략’이다. 이 세 가지 침략이 16세기 세계 변화의 핵심이다. 즉 현대 세계는 서양의 침략에 의해 이루어졌다.
콜럼버스는 ‘발견자’가 아니라 ‘침략자’였다. 그것도 ‘잔인한 침략자’였다. 아메리카에 살았던 수많은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들의 문화를 파괴한 ‘잔인무도한 침략자’였다.
그러나 미국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기는커녕 콜럼버스는 미국 최초의 영웅, 아니 최초의 인간, 그야말로 아담으로 기념된다.
그들의 궁극적 목적인 황금은 기대한 만큼 많지 않아서 서양은 무역 대신 주민을 죽이고 혹사하는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결코 순수한 탐험가가 아니었다. 오직 황금을 찾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인디오 노예화. “그들은 영리하고 훌륭한 하인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하긴 두 국왕 폐하께서 명령하시지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 전원을 붙잡아 카스틸랴로 보낼 수도 있고, 이 섬에 그대로 포로로 놓아둘 수도 있습니다. 50명의 부하만 동원하면 그들을 모두 복종시킬 수도 있고, 또 뭐든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디오는 인간이 아닌가? 인디오를 이성을 갖는 인간이라고 본다면 그들의 토지를 뺏고 고된 노동을 강요하여 생명과 건강을 침해함은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성을 갖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들을 노예로 부려도 무방했다. 또 그들이 인간이라 해도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기독교 사회의 법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되었다.
중세에는 기독교 국가만이 인정되었고, 14세기의 단테에 와서 인간 세계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교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었으며, 그것이 르네상수 휴머니즘의 기본적인 사고가 되었으나, 이는 16세기의 진보적 서상가들에게만 통하는 것에 불과했다. 즉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기독교 국가만 안장되었다…인디오를 노예화하고 심지어 죽인다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맺음말
이 책에서 나는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건너갔을 지도 모르는 인디언이 오랫동안 아나키 민주주의를 했고, 그것이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근대 사상, 예술, 사회운동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비록 인디언은 멸망했고 아나키 민주주의도 사라졌지만 그들의 삶과 아나키 민주주의는 자유-자치-자연이라는 인류사의 중요한 가치를 가장 먼저 구현한 것으로 남아 있다.
16세기 서양인이 인디언을 만나기 전 그들이 알았던 것은 자유-자치-자연에 반하는 구속-종속-인공의 삶이었다. 그들은 절대자인 왕과 교황의 지배를 받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고 정신적으로도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는 국가와 시장에 저항하는 민주주의다. 우두머리의 지배가 아닌 민중이 주인인 민주의 정치, 시장의 지배가 아닌 자족의 생태적 경제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서양의 국가와 시장의 무한 확장과 침략은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와 철저히 대립했고, 결국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그것이 20세기까지 인류의 역사다. 그러나 인디언 아나키즘은 인류의 마음에 남아 있다. 이제 21세기는 그 새로운 발견을 고대한다. 우리는 21세기 세계가 인디언 아니키 민주주의로 부활할 것을 고대한다.
무엇보다 자유와 자치의 정치, 자급과 자연의 경제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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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문명의 ‘야만사’를 통해 돌아보는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의 아픈 역사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있었던 자유-자치-자연의 아나키 민주주의! 협력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상생의 미래로 가기 위한 또다른 ‘오래된 미래’를 서양문명의 야만사를 통해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으로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