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환상이 상연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즉 충분히 만족되는 장면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것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내고 무대화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근본적인 초점은 욕망이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주체의 욕망을 조정하고 그 대상을 특화시키며 그 속에서 주체가 취하는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환상의 역할인 것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되는 것은 오직 환상을 통해서다.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세계들의 상점. 핵전쟁 이후의 일상생활을 그리는 공상과학 소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측면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반드시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그 함정 속에 욕망의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물物 자체’인 것을 물 자체의 지연으로 혼동하며 사실상 욕망의 실현인 것을 욕망의 추구로, 욕망 고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그것이 ‘충족되는’ 것, ‘충분히 만족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의 재생산, 욕망의 순환운동과 함께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즉 욕망을 구성하는 결핍을 재생산하는 상태로 자신을 위치이동시킴으로써 욕망을 실현했던 것이다.
불안이라는 라캉의 개념의 특성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은 욕망의 대상-원인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핍 자체를 상실할 위험이다. 욕망의 소멸이 불안을 초래하는 것이다.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소설 『검은 집』은 환상 공간이 텅빈 표면, 즉 욕망의 투사를 위한 일종의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불행히도 젊은 엔지니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고 만다… ‘검은 집’은 그들 자신의 향수어린 욕망과 왜곡된 추억들을 투사할 수 있는 하나의 빈 공간 구실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검은 집’이 그저 낡은 폐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젊음 침입자는 그들의 환상 공간을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현실로 환원시켜버렸다. 결국 그는 현실과 환상 공간 간의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접합할 수 있었던 장소를 그들에게서 박탈했던 것이다.
어떻게 무가 유를 낳을 수 있는가

“슬픔으로 인해 잘못 보시어, 참된 것이 아닌 상상에 불과한 것을 슬퍼하시는 겁니다.”
“나의 이 슬픔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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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똑바로가 아니라 삐딱하게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욕망의 역설?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끝없는 재생산이야말로 ‘소비주의’ 삶의 원동력이 아닐지. TV, 유튜브, 그야말로 대중문화의 한복판에서 상품광고로 끝없는 소비욕구를 자극하고 생산해내는 마케팅이야말로 철학자 지젝이 말하는 ‘환상’을 끝없이 펼치고 있는 무대의 주인공이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