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전우익. 130쪽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경독의 일체화라고 여겨요. 참된 경은 독을 필요로 하며, 독도 경을 통해서 심화되고 제구실도 할 수 있겠지요.
혼자만 잘 살믄 별 재미 없니더. 뭐든 여럿이 노나 갖고,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 주는 것, 그게 재미난 삶 아니껴.
일에는 세상에 알릴 일이 있고, 몇몇이만 알 일이 있고, 가장 소중한 일은 단 둘만이 아는 거 아닙니까.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신경림
“요즘 아이들은 제대로 맛을 모르는기라.”
“일 중에서 창조적인 것은 농업밖에 없으니더. 상업은 물건 팔고 사는 거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농사야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 아입니껴.”
“인간과 동물은 소비만 하고, 식물만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의 나무와 풀에 대한 철학이다.
“양수리에 가보면 부들이 지천으로 흔해요. 아무리 흔하면 뭘해요. 세상에서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거지요.”
“무얼 했다고 살면서 쓰레기까지 냉기니껴. 쓰레기라도 안 냉기고 살 생각이래요.”
“덜 먹고, 덜 입고, 덜 갖고, 덜 쓰고, 덜 놀고, 이러면 사는 게 훨씬 더 단순화될 터인데요. 쓰레기도 덜 생기고, 공해니 뭐니 하는 문제도…풍요가 덮어놓고 좋은 것만 같지는 않아요.”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철 따라 옷 바꾸어 입는 일에 골몰한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에 귀기울이게 할 순 없을까? 더 값진 집과 승용차에 인생을 건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 먹혀들어 갈 수 있을까?
세월이 가는 걸 본 사람도 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세월은 가고 나무도 자랍니다. 나무는 뿌리만큼 자란다고 합니다. 뿌리보다 웃자란 미루나무는 바람이 좀 세게 불면 나가 자빠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데, 눈에 뜨이지 않는 일보다는 눈에 보이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민심같이 느껴집니다.
노를 꼬는 요령은 좌우 양쪽 굵기를 같게 꽈야 질기고 맵시도 납니다. 좌경용공이라고 왼쪽을 약하게 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노끈으로는 낙젭니다. 한 손으로는 노를 못 꽈요. 왼손 오른손이 다 다릅니다.
자리 매면서 이런 생각도 해요…자리 하나 매는 데도 틀이 있어야 하듯 무슨 일을 하자면 틀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어요…자꾸 살기가 자꾸 복잡해져요…이건 그 어떤 큰 틀이 잘못되었거나 씨가 옳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상이라는 틀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잘못된 틀은 사람을 잡습니다.
농민들은 세상을 머리로 평가할 만큼 명석하지 못합니다. 생활터전인 논밭과 곡식값과 아이들 표정과 여편네들 바가지 긁는 소리로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한응대지발춘화.’ 꽁꽁 얼어붙은 겨울 추위가 봄꽃을 한결 아름답게 피우리라는 노신의 시구절입니다. 겨울과 봄이 남남이 아니라 맞물려 있다는 뜻 같기도 합니다.
선일꾼은 소에 끌혀가고 상일꾼이 소를 부리듯이, 미숙한 대중은 세상에 끌려가고 성숙한 민중은 세상을 바로잡아 갈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전경.농민이 제대로 농민 구실을 하자면 땅과 스스로와 세상을 함께 갈고 가꾸어야겠다고 느낍니다.
물통의 법칙. 지금 농민들은 농사 짓는 일은 아주 열심히 합니다. 겨울에 비닐하우스까지 만들어 죽자 살자 일해요. 그래서 한쪽 판자는 굉장히 높아요. 한편 스스로와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무관심해서 다른쪽 판자는 아주 낮아요. 새빠지게 물을 부어 봤자 물은 낮은 판자까지만 차지 절대로 더 높이 올라가지 않지요. 그 차가 심할수록 좌절감은 크고 한은 사무칩니다.
스스로를 갈려면 세상도 갈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세상과 스스로를 바꾸지 않고서는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지요.

엄동설한 눈 속에 오직 삿갓 하나 쓰고 가면서 춘삼월과 한여름을 함께 안는다는 것이 얼마나 여유롭고 풍족합니까? 어찌 생각하면 삿갓 하나만을 가졌기에 그런 여유가 생겨났는지도 몰라요. 삿갓을 한 짐 졌더라면 행여 엎어질까, 자빠져서 삿갓이나 다치자 않을까 마음이 온통 콩밭에 가 있어서 삼월의 진짜 나비도 눈애 띄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해요.
이른바 민중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편을 들어 왔어요. 알게 모르게 달콤한 인공 감미료를 동경하고 선망해 왔습니다. 서울을, 나라를 이렇게 만든 근본적인 책임은 민중이 져여 합니다.
“야! 그놈들 집지게 논다”
진짜 모임은 이기는 과정에서 집이 나야 하고, 집이 나면 발라야 하는데 계속 뒤집어 이기기만 하면 그대로 굳어 버려요. 집이 나도록 이겨진 흙은 대상에 발라져서 대상과 한덩이가 되어 새롭거나 더 완전한 물체로 거듭납니다.
일을 변화시켜 노동의 고역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게 아니고 나와 내 자식만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입니다.
노동이 제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노동이 곧 사회적 실천이고 새 세상 만들기 운동이겠지요.
오늘날 일이 크게 둘로 양분되어 정신 노동, 육체 노동으로 나누어졌는데 이것도 빨리 어우러져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경독의 일체화라고 여겨요. 참된 경은 독을 필요로 하며, 독도 경을 통해서 심화되고 제구실도 할 수 있겠지요. 방에 틀어박혀 책상 붙들고 앉아서 천하명문이 나온다면 천하는 무색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풀은 말없이 돋아나서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벌이는 일은 처음이 지나치게 요란스러워보입니다…일을 지나치게 벌여 가지가 줄기와 함께 시들어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종종 봅니다…나무가 싹터 크고 가지 치는 데서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사람들은 억지와 경쟁으로 자신과 이웃, 줄기까지도 갉아 먹으면서 크려고 하니까 일이 뒤틀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 땅에서 하루 빨리 관광버스가 없어지고 순례자들의 행렬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스님, 그런데 별로 그럴 가망은 없어보입니다. 지금 서울을 비롯한 도회지에서 떠들썩한 집세 파동이란 걸 보십시오.
남에게 뒤질세라 구경꾼이 점점 불어나서, 서로 돕고 이끌면서 구경꾼이 구경거리가 되고, 구경거리가 구경꾼이 되는 구경판이 올 봄에는 더욱 크게 벌어져 단군할아버지도 신나 할 것 같습니다.
씨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고 묻기 쉬우며 땅에도 별 부담감을 주지 않습니다…큰 나무는 옮기기도 심기도 힘들고 살리기도 힘듭니다.
그 씨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을 때 심어졌는지도 모르게 심어 그 사람이 씨를 싹트워 키우고 꽃피워 열매 맺게…
뒤범벅이 삶이 되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리 바뀌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아주 작고 작은 일에 서로 부담감 주지 않고, 소리 없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올 봄의 소원으로 삼고 싶습니다.(세상을 바꿀 씨앗을 품은 작은책! 커다란 생각의 작은 씨앗?!)
세상에 나는 물건을 사람만이 독식해서는 안 되지요. 새와 곤충이 없이 사람만이 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우리의 어매와 아배가 맨몸으로 맞닿아서 우리를 낳아 주었으니, 몸과 흙이 맞닿는다는 것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거기서 생명이 잉태되고 곡식이 자라고 역사가 새로워지는 것이겠지요.
노신의 인간 파악.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작은 고비 하나 넘는 일인데…죽어도 그 한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겠단다…개인의 자립이 없이는 결코 민중의 연대는 생겨나지 못하고,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결코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스님, 「광인일기」에서 노신이 비판하는 대상은 민중입니다.. 왜 민중을 미워했을까요? 무슨 까닭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할 피억압자 쪽의 ‘주체성’을 중요시한 것이라 합니다. 곧 민중이 정치의 ‘객체’에서 ‘주체’로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거죠.
노신은 새로운 사상을 통찰했지만 자신은 ‘새로운’ 쪽에 서지 않고, ‘낡은’ 쪽에 머물면서 아Q를 가혹하리만큼 비판하면서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재단하지는 않았지요. 민족, 곧 자신의 가장 뒤떨어진 부분에 대한 고집, 그것이 노신의 ‘저항’이라고 생각돼요. #노신 #아Q
집회 구호? 집회가 집회로 끝날 수도 없고 집회에 모인 사람들과 그 뒷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곳에서 어떤 다짐들이 외쳐진 것도 중요하지만 민중들은 뒷설거지가 제대로 이루어졌나를 보고 그 다짐들을 판단하는 게 아닐까요?
음식 솜씨는 상차림에 나타나지만 인간의 됨됨이는 설거지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제가 읽고 알기로는 동학당들이 보은과 삼례에서 모임을 가진 다음 뒷처리를 깨끗이 했다고 합니다…결국 우리들은 동학당들이 외친 소리만 주워 들었지, 손과 발로 살아가는 모습은 배우려 들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네요.
노신은 의학 공부를 때려치우고 문학쪽으로 갔지요. 그 이유를 그는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 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할지라도 하나도없는 구경거리와 구경꾼이 될 뿐이다.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정신을 뜯어고치는 일이다. 정신을 뜯어 고치는 데는, 당시의 나의 생각으로는 문예였다. 그래서 문예 운동을 하려고 생각했다.”고 했지요. #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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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이 아닌 ‘경독의 일체화’를 이루신 ‘진정한 노인’의 이야기가 가벼운 책 한권을 통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초고령화 시대로 접어든지 이미 한참이지만 진정한 노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나이든 어른의 참모습을 일깨워주는 이야기 속에 담긴 삶의 깊은 깨달음 또한 깊이 새겨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