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박홍규. 481쪽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그것이 자유와 자치가 아닌 경제적 평등의 추구에만 치우치게 되면 전제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왜 토크빌과 아렌트를 읽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일반적이다. 토크빌과 아렌트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간접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직접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토크빌과 아렌트를 읽는다.
토크빌, 마르크스, 아렌트 따라서 토크빌도 마르크스도 아렌트도 완벽한 모델은 아니다…무엇보다 그들은 그 시대 사람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란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배려를 결여하고 물질과 경제를 최우선으로 삼아온 것이 아닐까? 요컨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우선주의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의 전형은 그 귀결은 아닐까?

경제적 부만을 추구하는 경우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는 없어지고 전제주의와 전체주의로 타락한다고 경고했다. 20세기 100년 동안 우리는 경제적 발전과 평등만을 민주주의라고 오해한 것이 아닐까?
토크빌과 한국. 나는 독자들이 토크빌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읽기를 권유한다. 무엇보다도 토크빌이 민주적 전제의 특징으로 본 다음과 같은 점들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었다. 물론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점도 지적했지만, 문제점이 없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그중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만큼 문제가 많은 경우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갖는다. 민주주의의 문제점은 민주주의 자체에 의해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촛불’이 보여준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감동하며…확신한다.
1989년 11월의 동유럽 봉기…그 봉기가 성공한 이유는 그 혁명의 대의명분인 민주주의 자체를 사람들이 신뢰한 탓이 아니라, 공산주의보다는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이익을 주리라고 생각한 탓이었다.(경세제민)…여하튼 경제를 무시하는 순수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절제된 경제, 특히 자연 생태를 파괴하지 않는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절대명제로서 추구되어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기원」 독서 가이드.
아나키즘적인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취임했다...부자들의 경제가 정치를 정복한 결과 정부는 사적 이익을 위한 겉치레로서만 봉사하게 되어 정치의 타락과 시민의 몰락을 가져왔다…아렌트는 이것이 탐욕과 자만, 아첨과 위선, 사회의 원자화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를 낳아 결국 20세기의 전체주의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나는 아렌트가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근본적인 분석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요컨대 나는 우리 시대와 씨름하기 위해 아렌트를 읽었고 이 책은 그런 독서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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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 물든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치유방법은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에 있다! 결국 그것은 21세기에 필요한 ‘아나키즘’의 모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