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드 에콜로지. 김원중. 303쪽
음식은 생명체를 연결하는 고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배고픔을 채우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음식과 섭생은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동시에 인류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식은 수직적으로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통로인 동시에 수평적으로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음식은 인간이 우리 주변의 자연 및 우주와 맺는 가장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관계이다.

나는 먹이사슬 어디에 위치하는가.
:게리 스나이더의 실존적 화두
그는 먹이사슬을 통한 에너지의 전이가 모든 생명체가 삶을 이어가는 근간임을 인식하게 된다.(생명이 생명을 먹는다!)

소비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음식은 우리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슈퍼마켓 선반에 놓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물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대부분의 음식은 그 원래 형체를 전혀 또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된 채 매력적인 모습으로 포장되어있기 때문에 많은 음식들이 사실 어떤 생명체의 주검이라는 것을소비자가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물리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죽은 짐승의 썩어가는 고기를 먹고 사는 육식성 조류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털복숭이 내 둥근 배는 / 누구의 무덤입니까?” – 최승호, 대머리 독수리 2
필연적인 비영구성과 고통에 대한 정통한 인식이 연민의 마음을 일깨운다. 이런 사실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가 더 이상 무지하며 독선적인 음식 소비자로 만족하며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나이더는 안심이나 등심 스테이크라는 단어 대신 의도적으로 “피범벅이 된 잘려진 근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소의 근육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하여 우리를 충격으로…”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려 들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우리가 먹는 것은 ‘그 소의’ 생명, 도약, 휙 하는 움직임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실을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식은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물질이자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음식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영양분이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스나이더의 생각이다.
김지하는 우리의 음식문화에서 잘못된 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음식에 대한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것인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먹는 음식과 우리 자신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의식을 회복하고 섭생의 신성함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나락 한 알 소 우주? 하긴 쌀 한 톨이 여물려면 볍씨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노력과 노동, 햇빛, 바람, 물, 흙, 계절의 변화, 우주의 온갖 질서와 벌레와 심지어 참새와 메뚜기, 거름 등이 다 같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쌀이 밥이 되는 과정에는 방아나 절구, ‘물과 불의 제사’라고 불리는 아궁이와 솥의 부엌을 통과하고 어머니들의 밥상 차리기를 모두 지나야 하는 것이니 농본 시대의 삶의 표준으로서는 그야말로 세상사 중 가장 중요한 세상사요 우주사 중 가장 으뜸 되는 우주사이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우리가 음식 없이는 살 수 없는 데도 쌀 한 톨이 지닌 우주적 함의에 대한 인간의 무지로 인해 음식을 귀히 여기지 않고 멸시한다고 지적한다.
“요즘에 다 밥 우습게보지 / 밥이 부처님이라면 / 놀래!”
향아설위? 밥이 곧 생명이고 한울이라는 인식은 제사지낼 밥그릇을 현재 살아있는 자기 자신 앞에 되돌려 놓고 지금 살아있는 인간, 제사지내는 자신이 제사를 받는 사람이 된다.
생명의 순환 원리. 이천식천,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먹이사슬의 원리이며 공생의 원리이다.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가진 근본적인 특성은 공동체성이다….우주적인 협업이 필요하다…그렇게 생산된 음식은 또한 공동체적으로 향유되고 소비된다.
소통과 공존의 음식.
백석 시에 대한 생태론적 고찰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음식에 관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은 백석이다.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명 백석은 이렇게 생산되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에 주목한다.
그에게 있어 음식은 우리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욕망의 대상이나 육체적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물질의 차원을 넘어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를 통합하는 매개이다.
생명과 상생의 농업 그리고 음식
:웬델 베리의 섭생의 경제학.
음식과 섭생에 관한 웬델 베리의 사유는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농업적인 행위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베리는 섭생의 문제를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음식물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섭취에 이르는 과정 전체를 일컫는다고 정의한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음식문맹자에서 음식문명인으로.
영양주의의 한계
현재 음식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인 마이클 폴란은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식품 과학자들과 판매업자, 미디어, 정부가 제시하는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음식 문맹자가 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영농산업과 음식산업은 우리를 음식의 근원에서 분리시키고, 음식이 마치 공장에서 제조할 수 있는 공산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하지만, 음식은 해, 흙, 물, 공기를 위시하여 생태계 전체의 노력이 합쳐져 나온 것이다.
폴란은 자연, 정원, 식물,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비롯한 많은 소재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문제를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섭생에 관한 그의 견해는 “제대로 된 식품을 먹고, 소식하며, 되도록 식물성 식품을 섭취하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현재의 섭생은 오염된 음식과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데 폴란은 그 원인으로 영농산업이라 불리는 농업의 산업화와 이에 힘입은 공장식 가축사육을 지목한다…농업은 가족농에서 막대한 자본과 에너지 투입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농으로 바뀌었다. 단기간에 최대한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효율만능주의적인 산업적 농업….화학비료는 질소를 인위적으로 고정시켜 생산성을 극대화하지만 이로 인해 토양은 원래의 비옥함을 잃게 되고 농사를 전적으로 더 많은 비료에 의존하게 만든다…
현재 우리는 먹거리의 풍요와 진정한 먹거리의 궁핍이라는 모순적 상황에 처해 있다.(풍요 속 빈곤)
베리는 우리가 섭생의 문제를 흙과 동식물과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큰 주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달리 말해 섭생이 불가피하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농사적인 행위임을, 그리고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먹어야만 살고, 그 먹는 음식은 농부가 땅에, 넓게는 자연에 의지해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뗄 수 없는 유기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베리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식은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물질이자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미친 농부? “농부로서 진정한 소명에 대한 시적인 비전에 의해 추동된 혁명가이다. 단지 곡물만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온 자연의 생명을 염려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를 뛰어넘어 지속하는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연이 / 최고의 농부다, 자연은 / 땅을 보전하고 비를 보존하기 / 때문이다. 자연은 토양을 깊게 하며 /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연은 / 다양하며 질서정연하다. / 자연은 땅 위에서 / 우리의 어머니이지 선생이고 최종 재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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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환경위기는 그야말로 방안의 코끼리 같은 존재이다’ 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진짜’ 음식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지’해진 현대인의 음식문화에 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키는 ‘문학적’ 사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