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고갱, 슬픈 열대. 폴 고갱.
예술작품은 비물질적인 것이고 초월적인 것이기에 표현되지 않는 것, 즉 물질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네. 고갱은 목줄 없는 굶주린 늑대라네.”
그는 비평가들을 남의 일에 끼어들어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자들이라고 했지요.
“다들 나름대로 훌륭한 작품이오.”
당신이 남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아 추종자를 거느리는 순간부터 당신은 분류되고 서열이 매겨지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작품은 이름을 얻게 되겠지만 그 이름이란 것은 고작 5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세대에 의해 시대에 뒤떨어진 예술로 평가받게 될 겁니다.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는 고갱일 뿐입니다. 문명의 족쇄를 싫어하는 야만인이며 창조주를 시셈한 나머지 틈만 자기만의 작은 세상을 창조해내는, 거인족의 운명을 타고난 사내입니다. 새로운 장난감을 부숴버리는 어린아이입니다.
저 또한 야만인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두 살을 더 먹었지만 20년은 더 젊어져서 떠난다. 올 때보다 더 야만인이 되었지만 훨씬 더 현명하게 되어 떠난다. 야만인들은 낡은 문명에서 온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 무지한 사람들이 내게 삶의 방법과 행복의 미학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고 깊은 진실에 눈뜨게 했다.
그들은 순진무구하다. 문명인들의 가학적인 제복이니 수치스러운 겉치레, 사랑의 은밀함 따위가 전혀 없다.
나는 인상주의를 사진과 같은 기계적인 그림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아주 새로운 시도라 생각하네.
나는 가능한 한 사실이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그림자 또한 햇빛이 주는 눈의 착각일 뿐이야. 그래서 난 그걸 지워버린다네.
상상력이 넘쳐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틈나는 대로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러고 나서 자연을 바라보면 새로운 기쁨이 생겨난다네. 결국은 개성이 문제 아니겠나.
하지만 자연적인 그림이란 게 있기나 하단 말인가? 본래부터 그림에는 관습적인 것과 의도적인 것이 들어가게 마련이지.
억압을 극복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억압을 떨쳐낼 수 있고, 생각해 보면 꿈은 언제나 현실에서 나온다네. 야성의 인디언은 파리의 신사를 꿈꿀 수 없을 테니 말일세.
무모한 도전? 하지만 그게 무모하다는 것은 다만 물질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네. 아무리 단단한 돌덩이도 결국은 부서지게 마련이지만 표현이란 영원히 남는 거라네.

감람산의 그리스도. “저건 제 초상화입니다. 또한 이상향 상실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요. 이상향을 상실하는 것은 신과 인간 모두에게 두려움이었을 겁니다. 예수는 모두에게서 버림받았고 제자들마저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배경 또한 그의 영혼처럼 슬픈 것입니다.”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이 나를 구속하네. 나는 말할 수 있네. 사람들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아는 것은 아주 적지만 내 스스로 깨우쳤기에 이 지식을 사랑하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작은 지식이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 아주 큰 것이 될지? 지금은 정말 변혁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시대라네!
https://photos.app.goo.gl/VuR3onWFwB4Jp7Zb8
삶은 기록된다! 고갱의 삶이 고스란히 쓰여진 편지들이 그의 치열했던 삶과 예술세계로 깊숙히 다가설 수 있게 해줍니다. 가난과 고통의 삶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유’를 지키냈던 한 ‘야만인’의 삶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