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교자. 김은국.도정일 옮김. 320쪽
“자네라면 어쩔 텐가?”
“저라면 진실을 얘기하겠습니다.”
그의 질문은 내겐 실로 무서운 질문이었어
“내 직업이 직업이라 사람 죽는 거야 숱해 보았지. 의사로서 난 내 환자들이 왜 죽는가를 설명할 수 있소. 하지만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는 건 나로선 도저히 설명이 안 돼. 그 문제의 밑바닥에 도달하면 도저히 합리적 설명이 나오질 않아요. 아무 뜻도 없거든. 그러나 그 죽음이 무언가 뜻을 가지긴 가져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부인을 이해하게 된 거군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에 필요했던 것-종교를 갖고 신을 가져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거지…”
저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오. 아내는 슬픔과 무서움에 질려 내 말을 참고 견디어내질 못했소…
그때 난 속으로 다짐했소. 앞으로 다시는 나의 그 잘난 진리, 남들이 모르는 내 진실, 하나님의 종에게 숨겨진 그 무서운 진실을 결코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거요.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고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난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저 사람들에게 떠나라고 얘기해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기고 있지 않다는 얘길 해주십시오. 평양을 사수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모두 알고 있소.”
“알고 있다면 왜들 떠나지 않는 겁니까?”
“간들 어디까지 갈 수 있겠소? 그들이 그 고통을 얼마 동안이나 견디어내겠소? 젊은 사람들이 이미 떠났소. 그러나 노약자와 아녀자들은 떠날 수가 없소. 그들은 너무 약해요.”
“목사님은요?”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래 줄 사람이 없다면 나만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있고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잘 가시오, 대위.”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한국 소설의 오래된 고질의 하나이자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지방적 한계의 하나.
소설 속에 사건은 있으되 그 사건을 구성하는 방식들이 인간의 삶과 운명에 관한 보편적 주제의 특수한 탐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지방적 한계’이다.
‘순교자’의 재발견? 이 소설이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어떤 특수한 사건을 인간의 보편적 운명에 관한 ‘세계문학적’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이것이 소설 ‘순교자’의 큰 업적이라 생각한다.
고통이 의미 없고 인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인간은 그 난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순교자’가 파고드는 것은 이런 질문들이며 그 질문들에 대한 특수한 응답의 방식들이다.
“희망이 없을 때 인간은 동물이 되고 약속이 없을 때 인간은 야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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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난들, 특히 전쟁이란 거대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하는 인간에게 종교,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깊이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신에 대한 ‘허황된’믿음의 진실이 필요한 이유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