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이야기-1 생명의 빛.김민웅.
사랑을 고백하는 연애편지를 과학논문처럼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닐수록 그 이해가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구태의연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기독교인들의 상투적이고 틀이 이미 짜인 해석이든 비기독교인들의 성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든, 모두 성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사랑을 고백하는 연애편지를 과학논문처럼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초란 마치 흑암과도 같았던 나의 인생이 빛으로 바뀌는 순간이자 나 자신의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시간입니다. 창조는 생명의 가치, 평화의 가치, 빛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적나라한 책입니다…여기서 ‘적나라하다’는 것은 인간의 문제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 대해 빼고 더하고,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성서에는 그 모순이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발견하고 스스로 솔직해져갑니다.
23 창조의 특별한 뜻. 과학적 분석이나 해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세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질문을 해결하는 사고방식과 표현은 그런 틀 밖에는 없었지요. 그래서 신화, 설화나 전설 들은 당시의 사고방식과 기준으로 보면 합리적입니다.
25 태초에? 태초는 아득히 먼 우주적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시간입니다…나 자신의 인생에서도 경이로운 출발입니다.
흑암 같았던 인생이 빛으로 바뀌는 순간이 ‘태초’입니다…따라서 ‘태초’라는 사건이 그 사람에게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빛과 생명의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출발점이 ‘나의 태초’입니다. 태초는 아득히 먼 우주적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시간입니다.
영의 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이 사람 정말 멋있어”, “풍기는 기운이 달라”
27 빛을 만드는 말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창세기1:3
말은 우리 인생에 빛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생명을 넘치게 해야 하고, 사람들을 축복하는 능력이 있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비난하는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닙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세기1:4
“관점에 따라 다르지”?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마음의 눈이 영혼을 좌우합니다.하나님의 시선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으면 영혼의 차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는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시선입니다.
29 ‘존재의 창조’를 넘어 ‘가치의 창조’로. ‘창조’의 진정한 뜻? 그것은 ‘존재의 창조’를 넘어서 ‘가치의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란 단순히 “없던 것을 새로 만들었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창조’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가치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창조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을까, 빛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모든 생명이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창조라고 부른다는 거지요.
약자를 정복하기 위해 첨단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과연 창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건 파괴를 준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33 성서를 묵상해보면 뜻 깊은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단어 하나에도 담겨진 사연들이 천 갈래 만 갈래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럴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의 노동은 모두 창조적인 기쁨의 노동입니다. 그런덴 하나님조차도 이 놀라운 창조적인 노동을 하시면서 단 하루를 평안한 날로 만드셨는데, 하물며 인간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창조적인 노동을 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땀을 흘리며 고되게 일을 합니다. 그러면 정말 더 많은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경우 어쩌면 5일 일하고 2일 쉬는 것으로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루의 완성’은 이렇게 어두운 저녁에 휴식을 취하고 새 아침이 오는 것을 경험할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창세기1:5
37 결실의 아침을 맞으면 그 하루가 온전한 의미를 얻는다는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어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밝음으로 마치는 것이 하루의 시간적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참 주인. 바빌론 제국이 그랬듯이 칼과 창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땅의 참된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정복하고, 그 마음의 힘으로 땅의 생명을 꽃피우는 일을 하게 마련입니다.
40 축복의 삶이 곧 생명체의 존재 의미이지요.
“사람은 흙으로 만들었다”,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하면 대화는 결국 어느 쪽이 맞는지를 가리는 논증의 방식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깊은 얘기는 나오기 어렵지요.(대화는 논쟁 대신 화쟁으로!)
갈비뼈로 만든 하와(삶의 도반, 동반자, 나아가 공동체에 대해 돌아보자!)
사랑은 가슴에서 몸으로 갑니다….가슴의 뜨거움을 먼저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의 구조가 바뀌면 같은 존재도 달리 보이고, 그로써 선택도 달라집니다.
선악과의 교훈? 절대기준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 어떤 종교나 권력도, 인간의 주장도 모두 절대화되면 사람들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금지의 역설? 하지말라면 언젠간 하고 만다!)
성공의 그늘. 지난 세기 동안 이루어진 우리의 경제 성장을 보면 상당히 성공했다고 자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인간성은 얼마나 타락했는지 묻지 않을수 없습니다.
무너진 관계. 똑같은 소리고 똑같은 상황인데, 이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니까 “만나서 얘기나누자”가 아니라 “얼른 숨자”로 되었습니다.
가인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살인. 다 얻은 줄 알지만 사실은 다 놓치게 될 방법을 성공의 전략으로 믿고 선택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인문학자 김민웅의 성서 독법. 종교적 해석을 넘어 인문학적 독법으로 읽어내는 창세기 이야기. 모든 책에 깊이가 있고 그 깊이는 읽는 이의 그것과 같을 수밖에 없음을 단박에 깨닫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