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인의 풍경. 김민웅.
김민웅의 인문학에세이
용기는 역사를 만든다.
78 그건 승리해도 패배한 자의 모습이다…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것들을 성인이 되어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자들의 비극이다.
147 #지식인, 그 망명정부의 깃발 “진정한 지식인은 유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혹 현실이 그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역사는 그를 다시 불러들인다. 그를 추방한 현실이 패자가 되는 것이다.”
165 #같은 방법으로 날지 않는다. 몽테뉴, 수상록 “자유로운 영혼에서 새로운 시대는 마침내 태어난다. 그 영혼은 이 산맥에서 저 산맥으로 거침없이 날아가는 날개를 가졌다.”
168 몽테뉴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문체, 그것은 곧 그 사람이다.”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묘사되고 있는 대상보다 도리어 묘사하고 있는 그 사람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욕망이 그리는 지도.
그것은 다만 자연에 대한 측정과 표현방식의 차이만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자연을 대하는 세계관의 차이다. 이른바 근대의 전환기에 서양에서 발달한 경도와 위도의 개념은 각 지역의 좌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 땅에 그어져 있지도 않은 선을 자연에 덧씌워 만든 측정 기준에 불과했다. 이를 절대기준으로 삼아 분할할 수 없는 자연을 자신의 손안에 장악하는 방식이다.
지도… ‘땅따먹기를 위한 선긋기’였다.
삶의 숨결이 담긴 지도 그리기
우리의 옛 지도들을 자세히 보면 발로 걸어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그려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산세를 드러내는 산맥이 뚜렷이 그려져 있고, 강줄기가 산과 함께 묘사되어 있으며 마을의 모양새까지 정겹게 담겨 있다. 말하자면 자연의 생명력을 그대로 존중하고 그것을 따라 형성된 지형과 산세 그리고 하천의 흐름을 표현해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 지도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자를 대고 그은 직선이 아닌, 자연미 자체를 표현한 곡선이 어우러져 있고 도대체 몇 고개를 넘으면 건넛마을로 갈 수 있을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런 지도는 그 시대의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생활의 숨결과 자연의 풍모를 담고 있다.
세계지도 역시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지도, 그리고 국가의 경계선으로 나뉘지 않은, 산의 맥박과 강의 핏줄이 중심이 된 그런 지도는 벽에 걸어 놓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것이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숲을 없앤 자리에 들어선 문명에만 사로잡혔던 논리에서 해방되고, 비 내린 날의 도시처럼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메마른 도시의 몸에 풋풋한 흙냄새가 풍기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생명의 힘에 대한 감격을 되찾아 욕망으로 가려져 있던 눈이 깨끗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서툴고 초라해도 자유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가 되는 겁니다.
나비가 되는 힘.
자기에게는 오로지 벌레의 가능성만 있는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비극이다.
인생이란 의도치 않았던 일투성이다.
행복은 이런 시간들과 어떤 식으로 만날 것인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잘 짜여진 계획이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고, 현실이 어떻게 굴러가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잊혀져간다는 것은 사라져간다는 것과 같다. 존재하고 있어도 없는 것이다. 존재했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정받는다.
자유를 위한 양식
“끝까지 충실하게 크는 나무는 느리게 자란다.” ‘월든’의 작가 소로의 말입니다.
‘성장’에는 열을 올리지만 ‘성숙’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는, 말로는 행복을 추구한다면서 실제 그렇게 되기는 어렸습니다.
실제 집을 짓는 노동을 경험해보지 못하면 이 주춧돌부터 그리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보면 과정산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결과만 놓고 상대를 다그치는 경우도 생긴다. ‘관념론’의 해악이다. 이런 이들은 밑에서부터 땅을 파고 주춧돌을 놓은 후 힘을 다해 기둥을 세우는 절차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모른다. 지붕만 올리면 된다는 식으로 성과주의에 빠질 수도 잇다.
“진정한 지식인은 유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혹 현실이 그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역사는 그를 다시 불러들인다. 그를 추방한 현실이 패자가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란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언어의 창조자’이자, ‘잊혀지고 무시당하고 억압된 이야기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우리가 습관적으로 빠져 있는 언어사용의 모순을 주시한다.
“벤세레모스, 벤세레모스!”(단결하라, 단결하라!)
“내가 노래하는 것은 노래를 좋아하거나 또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기타도 감정과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네. 내 기타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오…봄의 향기를 가지고 열심히 노동하는 기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고 용감한 노래로 기억되고 싶다오.” 노래가 단지 가창력이나 음악적 감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신을 담아내는 힘인 것을 설파하고 있다. 굴절된 현실 인식을 바로 세우려는 민중예술가의 절박한 호소이다. 갈레노가 고뇌앴던 현실에 대해 그는 노래의 힘으로 육박해 들어갔던 것이다.
깨어나지 못한 민중은 자기도 모르게 끌려들어간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거나 비극적 사태를 반복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도된 현실인식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요구된다. 지식인이 권력의 논법에 마취되거나 그대로 머리를 숙이면 역사는 비틀거린다.
부조리한 현실 아래 지식인에게 대안이란 저항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저항은 자신의 인간됨을 지켜내기 위한 첫 번째 행위이다.
“난 내 가슴이 벌렁거릴 때만 살아 있다고 느껴. 그래서 온 거야….”
자유의 축복을 누리는 힘찬 세월은, 좀체 후퇴하지 않고 사육당하지 않는 용기가 가져다주는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