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품격. 이기주.
한 권의 책은 수십만 개의 활자로 이루어진 숲인지도 모릅니다. 『글의 품격』이라는 숲을 단숨에 내달리기보다, 이른 아침에 고즈넉한 공원을 산책하듯이 찬찬히 거닐었으면 합니다.
깊이 있는 문장은 그윽한 문향을 풍긴다. 그 향기는 쉬이 흩어지지 않는다. 책을 덮는 순간 눈앞의 활자는 사라지지만, 은은한 문장의 향기는 독자의 머리와 가슴으로 스며들어 그곳에서 나름의 생을 이어간다. 지친 어깨를 토닥이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꽃으로 피어난다.
당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좌우봉원. 일상의 모든 것이 배움의 원천이다 “삶은 내 곁을 맴도는 대상들과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다.”
‘실패하면 어쩌지?’ 생각이 행동을 끌고 나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생각의 상당수는 행동 뒤에 몸을 숨긴 채 꿈쩍도 하지 않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흠, 다리가 네 개 달린 책상을 만들면 뭐가 되죠? 그냥 평범한 가구입니다. 그럼 다리가 세 개 달린 책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면요? 그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성은 창작자의 능동성과 주관성이 잘 버무려질 때 생겨납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아니, 함부로 답해서도 안 된다. 삶의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다만 답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시끄럽고 번잡한 것에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 일으킨 삶의 물결에 올라탄다면, 언젠가 그 답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두문정수. “문을 닫아걸고 고요하게 지킨다” “밖으로 쏠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내면을 가꾸어간다”
삶과 글이 그리는 궤적은 곡선이다.
“아저씨, 정면을 똑바로 보지 않고 노를 저어도 괜찮아요?”
“하하하. 이 배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거라면 앞을 똑봐로 봐야 할 테지.”
“이런 배는 노를 저을 때마다 옆으로 기우뚱거리면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간단다.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면서 배가 움직이는셈이지. 그러니 건너편 선착장에 도착하려면 뱃길을 계속해서 고치면서 노을 저어야 해. 뭐,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그러할 테고. 이해되느냐?”
명백한 사실만을 문장에 담는다. 이를테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는 표현 대신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고 쓴다. “당번병은 친절하다”가 아니라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는 문장을 적는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때론 모호하다는 이유에서다.
어둠을 가로질러 빛을 향해 날아가는/ 새가 되었으면 한다./ 그 새들이 누군가의 삶을/ 밝은 쪽으로 안내하기를 바란다.
이는 내 글쓰기의 지향점이다. 내 문장과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다. 지향점은 본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