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살리는 글쓰기. 장석주
읽고 썼다. 그리고 살았다.
내 인생은 이 단문 두 개로 요약할 수도 있다. 내 삶은 다른 세상을 꿈꾸며 읽은 것과 쓴 것의 누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쓴 것과 쓰지 못한 것 사이에 있다.
25 작가들은 평생 시지프스의 노동을 하는 자들이다.
37 글쓰기…유한한 존재의 숙명을 넘어서려는 불가능한 욕망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망각에 대한 보상 행위 같은 것이다. 글쓰기는 자기 표현 욕구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망각에 반하여-이것은 어쩌면 죽음을 넘어서려는 의지일지도 모른다-기억의 가치를 현품으로 빚어서 영구화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창조의 일이고, 시간 건너뛰기의 일이다. 삶과 세계 경험의 총체에서 상상력을 풀어내고, 그 바탕 위에서 아직 살아보지 못한 저 먼곳의 시간을 끌어당긴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지금-여기에서 저 너머로의 건너뛰기이자 미래 시간을 당겨쓰기다.
아는 것을 써라. 결국 쓰는 일은 자기가 겪고 산 경험에서 시작하는 몽상과 창조적인 해석 행위다. 실제 삶에서 영감을 이끌어내야 더 생동하는 글을 쓸 수 있다.
자기 경험에서 뿌리를 내려 그 지층에 숨은 수많은 이야기를 찾아내서 써야 한다.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며 상상력을 뒤섞어 이야기를 발효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다!
생각하지 말고 일단 써라. 체력을 길러라. 작가는 문장 노동자다!
나는 스스로 글쓰기라는 감옥에 나를 가둔 사람이다…나는 왜 글을 쓰는가?…단 하나를 들자면, 그것은 ‘나’로 온전하게 살기 위함이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이 실천한 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은 다른 무엇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한 ‘나’로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글쓰기는 더할 수 없는 매혹이고, 유혹이며, 충만한 삶을 사는 한 방식이다.
꿈은 빠르고 현실은 더딘 것을/깨닫고/쓸데없는 희망을 끊고나니/아아, 편하군
자유롭게 쓰는 연필. 연필은 오래된 도구이고, 어쩌면 시대에 뒤진 연장이다. 편집자들은 저자들이 연필로 쓴 원고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김훈이 고집스럽게 쓰는 것은, 연필로 쓸 때 더 잘 써지기 때문이라고 한다.(오래된 미래!)
글 쓰는 자의 천국, 서재.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은 자로서 서재를 갖는 것은 행운이다.
황금빛 독서에의 권유
몰입했을 때 세상의 번잡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감히 내 가까이에 범접하지 못했다. 시립도서관 참고 열람실의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펼치면 어깨 너머로 들어온 햇빛이 책의 펼친 면 가득히 환하게 물들였다. 눈을 반쯤 감고 책을 들여다보면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 빛이 빚은 몽상 속으로 빠져들어 가곤 했다.
57 책이 주는 경이. 독서의 시간은 달콤한 몽상의 시간이자 영혼이 몰입 속에서 불멸을 겪는 놀라운 시간이다. 독서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제 안에 각인하고, 이제까지 살았던 기억을 불러내 되새김질하는 시간이다. 내가 독서에 빠져든 것은 자주 메마른 내면에 불꽃같은 기쁨을 일으키고, 우리를 행복으로 이끈다는 점 때문이다.
“독서가의 힘은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하고 목록화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눈으로 읽은 것을 해석하고 관련지어 생각해서 변형시키는 재능에 있다.”
독서 행위는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목록화하는 일이 아니다. 독서는 몽상의 심오함과 몰입의 환각 속에서 자기를 새롭게 빚는 경험이다.
오르한 파묵은 책이 주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책이 나무 한 그루나 새 한 마리처럼 인공에서 먼, 아주 자연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성에 가깝다는 것이 나를 매우 행복하게 했고, 책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느꼈다.”
59 황금빛 독서. 독서는 몽상의 심오함과 몰입의 환각 속에서 자기를 새롭게 빚는 경험이다.
60 책은 삶을 연장한다…움베르토 에코가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라고 말한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노인은 자기 삶만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살았던 이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전유한다.
감동을 주는 글쓰기
언제나 사물과 세계를 처음 바라보는 자의 경이로움을 갖고 써라
65 첫문장.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소박하고 간결하되 구체적으로 써라.
독자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이다.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은 말의 배후는 침묵이다. 말들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침묵이다. 침묵이란 말의 무한함을 품은 우주다.
세밀화가처럼. 군더더기를 잘라 버려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하라. 세밀화가같이 사실에 충실하게 쓰고, 써야 될 대상들을 큰누이인 듯 따뜻하게 품되 쓸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듯 차갑게 써라. 쓴 것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그 판단은 오직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라.
창조자의 지문, 스타일
분명한 것은 문체는 모방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아무리 읽어도 다른 작가의 문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문체는 무수한 물음과 회의를 견디고, 자기 단련을 거쳐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체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자기 내면의 분출이고, 반복할 수 없는 운명이다.
좋은 작가가 쓴 작품을 읽으면 오리지널리티가 일관적이면서도 강한 흐름으로 느껴진다…작가의 독창적인 창조의 영역에서 추출된 그 오리지널리티가 바로 작가의 문체이자 스타일이다.
영혼 없는 글을 쓰느니 낮잠이 낫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의 풍부한 보고이다. 사람들 내면에는 정말 엄청난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데, 태반이 그런 사실조차 모른다.
깊이를 두고 숙성하라. 대개 표층의 사유는 진부함을 벗어나기 힘들다. 진부함은 글쓰기에서 피해야 할 가장 큰 악덕이다…생각은 좁고 졸렬하며, 표현은 빈곤하고, 글은 아무 울림도 없는 화석 같은 상태다.
85 분명힌 것은 문체는 모방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아무리 읽어도 다른 작가의 문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문체는 무수한 물음과 회의를 견디고, 자기 단련을 거쳐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체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자기 내면의 분출이고, 반복할 수 없는 운명이다. 체액이 강요하는 필연
진짜 보는 것은 항상 문자 너머에 있다.
글쓰기는 창조적 통찰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세계에 보태는 일이다.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미 있는 것들을 뒤섞고 숙성시켜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빚는 일이다.
상투적인 글쓰기…단지 머리를 쥐어짜서 써낼 뿐이다. 이른바 영혼 없는 글쓰기다. 어떤 사물, 어떤 현상에 대해 독창적인 관점을 취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최초의 착상, 아이디어, ‘평범한 경계선’을 넘어서 오는 경험의 발견, 무의식의 솟구침은 글쓰기의 좋은 씨앗이다. 거기에서 얻은 생생한 검정과 감각들을 생동하는 언어로 써야 한다. 표현은 언어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영혼을 다한 글쓰기를 하려면 먼저 근육과 체력을 키워라. 영혼의 글쓰기란 기본적인 체력에 의해서만 뒷받침되며, 그런 체력에서 나오는 집중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진짜 보는 것은 항상 문자 너머에 있다.
책 읽은 사람의 상상 속에는 이미지라는 불청객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소설을 읽었을 때 뇌에 앙금처럼 남는 것이란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왜곡된 것, 제멋대로 각색되어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허구의 기억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몽상에 빠지고 그 몽상이 이끄는 대로 상상을 펼친다.
독서는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창조적 통찰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세계에 보태는 일이다.
창조는 경험에 대한 직관적 이해이고, 이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바탕을 둔다.
자,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라. 세상에 처음 태어난 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듯, 낯설게 하기는 새로운 인지의 지평을 얻는 수단이다…생동하는 언어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을 써라. 스타일이 없는 글은 죽은 글이다…스타일은 누가 보아도 자기의 글임을 증명하는 여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