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의 노래. 김훈. 328쪽
기록뿐인 죽은 자들의 이름을 되살려내는 역사 이야기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
2000년 겨울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했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나는 나 자신의 잘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칼의 울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32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36 칼의 노래.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다.
44 허깨비. 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헛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45 길삼봉의 허깨비는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길삼봉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내 길삼봉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이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삼봉은 천 명이 넘었으나,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다.
89 지휘 체계가 무너지면 작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조정은 믿기 두려운 일을 믿지 않았다.(인지부조화에 의한 자기합리화)
210 나는 해전 경험이 없었다. 장졸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적들이 들어온 포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서 동진했다.
214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물 위에는 없었고 바다는 언제나 새로운 바다였다.
247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병들이 물 위로 쏟아져내려 썰물에 쓸려갔다. 갑판 밑에서 노를 잡던 적의 적군들이 물 위로 쏟아져내릴 때, 조선말로 비명을 질렀다.
썰물에 떠내려간 적의 격군들은 대부분이 조선 백성들이었다.
내 칼은 보이지 않는 적을 벨 수 없었다.
손에 닿는 적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적들이 훨씬 많았다.
『난중일기』는 싸움터에서 백성의 신분으로 전사한 수많은 군졸들의 실명을 기록하고 있다….그 수많은 이름들은 고귀해 보인다.
이름만 전하고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 그 많은 넋들이 이제 편안하기를 바란다.
https://photos.app.goo.gl/WDeUbyifpGFZY8mi9
‘잊혀질 수 있는 기록’속의 이름에서 ‘살아있는 역사’ 한복판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을 되살려낸 역사소설.
“짧게 써라, 그러면 읽힐 것이다.명료하게 써라, 그러면 이해될 것이다.그림처럼 써라, 그러면 기억될 것이다.”
글쓰기 원칙의 ‘교과서’같은 김훈 작가님의 글이 생생한 ‘영상’처럼 펼쳐진다.
무력한 권력의 사악한 역사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가슴 아픈 역사는 결코 지난날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아픈 역사를 끝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촛불혁명’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