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 이진우. 337쪽
우리는 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가
21세기의 시대정신이 무엇이든 간에, 시대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 시대를 거스르고자 하는 자, 시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자 그 누구도 니체를 비껴갈 수 없다. 이성을 통해 세계를 발전시키려는 계몽이 기획된 후기 모더니즘이든, 인류가 이제까지 꿈꿔온 거대 서사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든 그 어떤 시대라도 논란의 중심에는 여전히 니체가 자리한다.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한 의심을 극단까지 몰고 가서 끝까지 시대와 불화했다는 점에서, 니체는 여전히 동시대인이다.
니체는 어디를 가든 그곳의 이미지를 자신의 언어로 빚어냈다.
니체의 삶과 사유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찾는 길이다
“삶이라는 것은 심연 위에 걸쳐 있는 밧줄과 같다. 건너가는 것도 힘들고, 돌아서는 것도 힘들고, 멈춰 서 있는 것도 힘들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창조적 파괴였다. 과연 그는 “인간이 아니라 다이너마이트다.”
권태와 허무가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여행을 꿈꾸는 것처럼 니체를 찾아 떠난 여행이 나에게 다이너마이트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어떻게 본래의 내가 되는가.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삶과 자기 찾기에 매달렸는지를 말해준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관찰은 에너지를 억제한다. 그것은 분해하고 파괴한다! 본능이 최선이다.”
건강한 예술은 삶의 비극적인 요소까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건강함과 거리가 먼 예술은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악보가 아니라 낱말로 쓴” 음악을 창조하고자 했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방랑의 진짜 이유.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니체는 익숙한 것들과 거리를 두고 낯선 것을 발견하고 우연을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사유를 확장하려고 했다.
삶의 진리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 진리가 아무리 무시무시하더라도 회피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하는 태도. 진실성은 이 진리를 삶 속에서 마주하고 삶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주관적 능력을 뜻한다.
니체에게 사유는 실존적 힘이다.
니체가 사유로부터 얻고자 한 것은 하루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실존적 힘으로서의 사유.’ 이것이 니체가 방랑을 시작한 진짜 이유다.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을통해 수행을 쌓는 일을 고행이라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찾아 떠나는 길은 고행이다.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는 극단까지 자기 자신을 몰고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몸을 느낀다.
그렇지만 어떻게 몸이 극단의 고통과 수난을 견뎌낼 수 있을까? 바로 사유를 통해서다. 몸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생각의 힘은 커진다.
니체에게 사유한다는 것은, 그것도 모든 것을 철저하게 뿌리까지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사물의 뒷면을 바라보다. 기존의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는 길…니체는 이 길에서 모든 사물을 반대편에서 바라본다.
75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하여 잘 살기를 꾀하는 방법. 양생법. ‘영혼의 양생법’…
그가 정신의 건강을 위해 선택한 양생법은 바로 고독이었다.
배네치아. 세상에는 준비하지 않고 우연히 찾아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있다…꼭 봐야 할 것을 미리 정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석양의 산마르코 광장과 운하에 비친 이미지들의 축제에는 계획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 관람…너무 많은 것을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나만 아니면 몇 개만 보는 것이 좋다.
종교. 신의 이미지는 우리가 현실의 고통을 망각하도록 만드는 환상에 불과하다.
110 도덕은 없다. 그는 도덕의 근원을 폭로함으로써 모든 도덕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이제까지 이 도덕에 의해 금지되구 경멸되고 저주받았던 것을 긍정한다.
112 니체의 도덕 비판은 지금의 삶을 긍정하고 오늘이 내일 또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하루하루를 제대로 개척하는 태도릏 가질 때만 인간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당부로 수렴된다.
114 베네치아….그러나 그곳에도 여유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유를 모르는 사람은 그 어느 곳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없다.
반전이 없으면 니체가 아니다.
의미를 하니씩 지워가다 보면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창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파괴가 아니다.
이런 친숙한, 그러나 있지도 않은 근원에 대한 믿음으로 이제까지 망각한 사물들을 재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채움을 위한 비움으로서의 허무주의!)
모든 것이 텅 빈 허무는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시작이다.
141 우리의 삶 자체가 허무인데 이 허무를 망각하게 만든 것이 바로 기독교다.
162 답은 간단하다. 스스로를 낮추고 약해져서 삶을 가볍게 하라는 것이다.(아이가 되어라!)

164 아이.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파괴만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지 못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170 내가 영원히 반복하길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 순간의 삶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영원히 반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너의 삶을 다시 살기를 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라!”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만을 찾는다면 결코 자신을 찾을 수 없다.
183 ‘질스 마리아의 은둔자’
184 자연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자연은 음악으로 다가온다. 귀를 기울여야 비로소 들리는 음악, 그것이 자연이다.
207 “나는 인간으로서는 고독이다.”
218 우리는 우리의 몸을 느껴야 한다…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자유정신은 결코 책상 앞에 묶여 있지 않다…자유 정신은 탁 트인 대지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삶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진리란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336 여행을 마치면서…
니체는 반복되는 일상과 고루한 생각의 틀 속에 갇혀 있는 나를 일깨우는 망치일 순 있었지만, 낡은 삶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다이너마이트는 아니었다.
니체가 나 대신에 질문을 던지고, 나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면, 그것은 지나친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니체를 따라 길을 떠나지만 니체를 버리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여행 내내 머리에 맴돌았던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