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427쪽
‘고전을 다시 쓴다’…정신의 역사가가 아닌 나는 과거의 책에 큰 관심이 없다. 나는 어떤 책이 미래의 책이 될 수 없다면 최소한 현재의 책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오늘날 내게 문제가 되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서 차라투트라와 대화를 나눈다.그것이 내가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방식이다.
책장만 넘기면 언제든 그에게 가는 문이 열린다.
“높이 오르고 싶으면 그대들 자신의 발을 사용하라! 결코 (나귀에) 실려서 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용기. 이것 하나만은 꼭 주문해 두고 싶다…귀를 열고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 니체는 그와 관계 맺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위험이다…“그렇다. 우리는 예외적인 사람들이며 위험인물들이다.”
“위대한 신이 우리 행성에 한 사상가를 오게 할 때, 그대들은 조심하라. 그때 모든 것은 위험에 처해진다.” 사물들의 질서가 뒤바뀌며 순식간에 인간적 노력의 모든 체계가 전복될 것이다.
신은 죽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모든 가치의 전환’ 그것뿐이다. 필요한 건 단지 생각을 뒤집는 것, 그것뿐이다.
니체와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진정한 철학자와 단순히 철학적 노동자에 그치는 사람들을 구분한 적이 있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사람이며 입법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사용할 개념을 창조하고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21 그러나 우리는 니체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그러나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부르주아 문화는 구체적 체험의 영역을 교묘히 은폐한다. 증명조차 필요 없을 것 같았던 자기 시대의 보편적 가치들이 실제로는 어떤 토대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발견했다. 선악의 기준은 ‘도덕적 감각’이 병화하는 것에 따라 계속 변해 왔으며, 신의 존재는 인간 존재로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예술이 찾는 영원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념에 불과했다.
니체는 진리처럼 주장되어 온 것들을 모두 파헤쳐 보면 단순한 맹목이나 독단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건강이 넘치는 자는 획일적으로 규격화된 생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낡은 습속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의 신체는 둔감한 신체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다.
긍정의 정신. 그러나 근대적 가치들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는 이 모든 저서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긍정의 정신이다…우리는 그 망치가 파괴의 도구가 아닌 창조의 도구임을 이해한다.(창조적 파괴)
71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75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만인을 위한 책, 그러나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책. 만인을 친구로 삼고 싶지만 아무나 친구로 삼지는 않는 책.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책이다.
“심오한 척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위해 애쓰며, 실제로 심오한 사람은 명료함을 위해 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영원회귀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실천의 반복, 즉 ‘차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들뢰즈는 니체를 다양성과 차이의 철학자로 만든다.
누구든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자는 니체를 읽지 않은 채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으며, 니체를 지지 않은 채로 니체주의자가 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었다!
그는 고정된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고정된 것들은 죽음과 관계한다. 그의 체험은 어떤 종류의 말이나 율법, 신앙과도 대립한다…실천,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이다. 「반그리스도」
인류에게 전하는 위대한 선물? 신을 죽었다!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은 좋은 귀를 만나지 못했다.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시장으로부터 멀어져라
도덕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한다. 일반화할 수 없는 것들까지 일반화하려 하기 때문에 도덕이 항상 기괴한 모습을 띠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겐 친구가 필요했다.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친구다. 무리나 추종자가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친구를 찾는다.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까마귀의 깃털 치장)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나 역시 계속해서 물어가며 걸었다. 물음과 시도, 그것이 내 모든 행로였다(‘중력의 영에 대하여’)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죽인다.
차라투스트라는 확실히 부정이나 혐오, 투덜거림을 통해서는 환한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주사위 놀이? 목적론의 거부. 노는 데 신성한 목적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성한 목적을 갖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노는 게 아니다.
놀이는 ‘자만’을 모른다. 놀이는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아이의 놀이가 그렇듯이 지칠 줄 모르고 즐거움에 겨워 쭉 계속될 것이다.
영원히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다.
결국 반복되는 놀이에서 생산되는 것은 반복할 수 없는 차이다. 반복은 차이와 다양성을 생산한다.
282 피로야말로 영원회귀의 적이다. 영원회귀의 동력은 즐거움이다. 즐겁기 때문에 영원회귀하는 것이고, 영원회귀 또한 즐거움을 생산한다.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세 가지 변신? 긍정의 낙타, 부정의 사자,신성한 긍정의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289 아이들의 신성한 놀이를 멈추게 하지 말라. 배울 필요가 없이 생을 즐기고 있는 신성한 아이들에게 못난 배움을 강요하지 말라!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변신론? 다윈의 본래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는 ‘진화’라는 목적론의 냄새가 나는 단어의 사용을 극히 자제했으며,….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거쳐 종들이 다양하게 변신한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위버멘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비도덕적 존재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에는 아이의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 여행 가이드북
다른 곳에서 니체는 객관성이나 확실성을 내세우며 사물이나 사건의 고유한 생명력을 없애버리는 학자들을 거미에 비유한 적도 있다.
창조와 생성. 이것이 ‘대지에 충실함’의 진정한 의미다. 대지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탄생이 있고 죽음이 있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대지 위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은 생에 대한 부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더 크고 다양한 생을 위한 예비 작업일 뿐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은 독자에게도 하나의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