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250쪽
“네가 죄인이다. 살인하고 도둑질해서 죄인이 아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데 행하지 않은 게 죄인이다.”
특성화고 학생에 대한 편견은 대개의 편견이 그러하듯 ‘잘 모름’에서 생겨나고, 편견은 ‘접촉 없음’으로 강화된다. (아는만큼 보인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이 몸을 만지지 못하는 슬픔이란 본디 남이 짐작할 수도 없고 그저 들을 수만 있음을 나는 이번에도 절감했다.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라.” “쓰러져도 회사 가서 쓰러져라” 우리 세대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았다. 너나없이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삶이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었을까. 지금에야 그는 질문을 던진다. 아이를 잃고 묻는다. 묻고 또 물으면서 알게 됐다…힘들면 회사는 가지 않아도 된다.
나를 지키는 게 먼저다.
교과서에도 안 나오고 근로계약서에도 없지만 꼭 명심하라도 다른 동준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붙잡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죄를 지어야만 잘못이 아니라 선함을 행하지 않음이 잘못이다.”
나는 겸손한 목격자다


트위터 친구들. 우리는 몰랐는데 그 친구들은 애 상황을 다 알았더라고요.
사람은 자기 일, 자기 문제가 되기 전까지 산재 사건이나 차별문제 같은 걸 떠올리기 싫어해요. 그런 풍토가 바뀌려면, 우리가 바뀌어야 하고 교육이 바뀌어야 해요. 어릴 때부터 기본 노동인권 교육이 있어야 해요.
사회적 장치 속에 한 아이가 놓여 있었고 자살을 선택한 상황이니까 사회적인 사건인 거죠. 한국사회는 어쩌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일지 몰라요.
밑에 있는 걸 드러냈으면 좋겠어요.
아픔이 클수록 아픈 사람끼리 모여야 해요.
선생님의 책은 저와 같이 무감각해진 사람들과 그와 같이 단지 세상에서 생존하고픈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책을 기대하며 파이팅하시길 바랍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