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묵. 고병권. 235쪽
침묵과 빈자리에서 만남 배움의 기록
묵묵. 소리가 나지 않는 텅 빈 말인데도 얼마나 묵직한지.
현장인문학…앎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다만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꺠달은 것은 희망 때문에 하는 일이 절망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희망이 희망으로만 남아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사람들은 누렇게 변색된 그 두 글자를 절망이라고 읽는다.
노들야학
‘묵(默)’이라는 글자는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흑’(黑)과 ‘견’(犬)을 합친 글자로, 개가 잠잠히 사람을 따르는 모습에서 나왔다고 한다. ‘흑’이 발음을, ‘견’이 뜻을 나타낸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밤길, 침묵은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소리로 가득하고 빈자리에는 온갖 존재들이 넘쳐난다.
희망 없는 인문학
#노들야학의 철학교사
곧잘 해낸다? ‘어쩔 수 없어서’ 그렇다!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것, 딱히 수도 없고, 까짓 것, 뭐 잃을 게 있다고, 이런 만들이 우리를 학생들 앞에 서게 한다.
각성은 교사들에게도 일어났다.
야학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낳았고 이 열망은 다시 (장애인)이동권에 대한 요구를 낳았다.
학생이 되려면 먼저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지금의 노들야학의 정신이다.
희망의 인문학? 가난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좌절은 지식과 정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식의 축적이 곧바로 좋은 삶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인문학자 자신의 삶이 보여준다.
#말의 한계, 특히 ‘옳은 말’의 한계에 하여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무엇보다 자기 말이 자기 삶에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때야 옳은 말은 비로소 옳은 말이 된다.
#목소리와 책임
책임진다의 어원? ‘응답한다’는 뜻! 듣지 않고 말할 수는 있지만 듣지 않은 것을 응답할 수는 없다 첵임이란 단지 ‘들을 수 있음’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들으려 함’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듣지 않는, 듣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사유하는 인간과 고통받는 인간
칼 마르크스. 한 사상가가 세상에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이 오는 것이고, 그 눈으로 본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다짐이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책은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쓴 귀하디 귀한 책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쪽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의 사상가였고, 그의 책은 우리의 책이었다.
그에게 사유란 고통의 머리이며 고통이란 사유의 심장이었다.
심오한 사상가는 편을 든다. 표면적 사상에는 거처가 없지만 심오한 사상은 제 자리를 알아본다
개가 짖지 않는 밤
#보는 눈과 보이는 눈
그런데 그의 ‘왼쪽 눈’은 ‘오른쪽 눈’ 이상으로 특별하다. ‘오른쪽 눈’은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왼쪽 눈’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왼쪽 눈’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오른쪽 눈’을 어떻게 보는지를 본다.
#자선가의 무례
#약속
장애인 수용시설. 그들 스스로 억울한 처지에 있다는 것초자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억울하다!
#말하는 침팬지
부이. 동물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우리가 들으려고만 하면 꽤 많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내게는 이 동물의 처지가 소수자들의 일반 처지와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인문학은 언어를 줄 수 있다고…그래서 정치적 존재가 되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듣지 못함’을 상대방의 ‘말하지 못함’으로 교묘히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무능을 상대방의 무능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내일’이 오지 않는 4000일
3999일.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큰 억울함은 복잡한 것에서 생기기 않는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것에서 온다….과거는 어제가 아닌 오늘까지 살고 내일이 없는 한 오늘이 한없이 미래로 이어진다….’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 시간을 바로 잡아야 한다.
##빈자리를 가꾼다는 것
이 운명과 춤출 수 있을까
#불가능한 코끼리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시각 장애인들이 그림 코끼리 그림 전시회 실감은 있는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코끼리인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한데 실감이 없는 코끼리인가.
초현실주의 작가 이브 탕기의 1929년 작품 , 「초현실주의 세계지도」 왜곡된 세계지도…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무의식이 실제로는 다른 현실감각이 아니었을까 상투적인 현실이야말로 비현실적이며 초현실임을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모든 현실은 비현실이고 초현실이다.
장애인들이 실감하는 현실은 상투적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비판이며 상투적 현실과는 다른 현실의 존재를 보여준다.
#장애인, 슈퍼맨, 위버멘쉬
‘장애인’과 ‘슈퍼맨’이 만나는 이곳에서는 ‘에이블리즘(ableism)’, 일종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다….한쪽 끝에 능력 없는 장애인이 있고 반대쪽에는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있다.
슈퍼맨은 우리에게 결핍된 능력의 구현체지만 위버멘쉬는 우리에게 결핍이 있음을 아는 순간 곧바로 발휘되는 능력의 구현체다.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자립하기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 필요도 있다.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서) 기술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것인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배낭이 없는 사람
디오니게네스. 견유주의 철학자들. 배낭,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사는 삶을 상징
#햇볕, 그것뿐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니게네스의 이야기. 권력과 부, 지식에 대한 전복적 태도에 감탄하게 된다.
알렉산더의 주장은 ‘왕이 주권자다’. 디오니게네스의 대답은 황제가 줄 수 없는 것!
내가 이해하는 「공산주의당 선언」. 이 선언의 급진성은 지배계급을 향한 ‘바람 없음’ ,’소원 없음’ , ‘기대 없음’에 있다…소유물에서 아무런 매력도 발견하지 못한다.
매력 없는 부르주아지! 이것이 「공산주의당 선언」의 위대함이다.
부르주아지는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선언의 주창자들은 ‘네가 가진 것 중에 내가 원하는 건 없다’고 대꾸한다.
「공산주의당 선언」의 전복성은 ‘결핍을 결핍하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에 있다….선언의 주창자들은 부루주아지이 비밀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결핍감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다시 알렉산더와 디오니게네스로 돌아가 보자면, 디오니게네스의 답변은 생각해볼수록 위대하다…요컨대 알렉산더에 대한 디오니게네스의 답변은 이런 것이다. ’왕은 주권자가 아니다.’
희망이라는 사슬
‘희망’이란 미래를 보며 갖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없는 ‘맹목’에서 나온 것이다.
#재판 이전에 내려진 판결
어떤 손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책이나 제도 때문에….제도적 설계에 의해 ‘장애화된다’는 생각이 없다. 국가의 차별적 설계에 의해….그러나 헌법 조문에는…장애인을 돕는 자선가로서의 국가만이 나타나 있다.
비장애인의 삶에서는 당연한 출발점이 되는 권리들이 장애인에게는 도달점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장애 문제를 복지 문제로….
장애인의 권리? 자유권이 아닌 사회권으로 바라보는 시각들…
#에필로그_그 끝이 미완인 이유
루신….그의 마지막 글은 미완인가. 왜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들은 미완인가. 그것을 그들이 끝까지 쓰기 때문일 것이다. 끝내는 글이 쓰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길, 내 곁에는 언제나 개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걸을 때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