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움이 없는 학교, 프레임을 바꿔라. 이성대. 336쪽
지금까지 교육에 의미 있는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교육정책들의 특징? 장기적이고 개선을 동반한 개혁과 참여, 그리고 교사들이 진정성을 갖고 주도한 시도들이었다.
당장 수업을 바꾸는 것보다 철학을 이해하고 교사들이 신념과 가치를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공사례의 오류? 무조건 성공한 사례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미련한 방법이다.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배경과 자원을 고려한 조화가 필요. 핵심적인 가치와 철학은 분명히 배울 것이 있다.
배움은 정확한 답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탈레스의 주장은 명백히 틀린 것이지만…. 사물과 현상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 배움이다. 비록 탈레스는 틀렸지만 그가 신과 신화를 배격하고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간은 진리에 한 발짝씩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배움은 질문이고, 질문이 답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배움에 대한 정의는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학즉불고(學卽不固)로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협소한 사고의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유연한 사고로 진리에 다가감을 의미한다는 내용이다. 올바른 배움은 사실 기억하거나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 정답이 아닌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왜’ 배움이어야만 하는가
미래, 과거가 닿지 못한 낯선 세상

끊임없는 도전의 목적? 문제해결? 결국은 발전이나 사회적 진보가 아니라 개인의 생존 문제 해결로 귀결…? (기술)진보가 추구하는 것은, 이익(이윤) 추구..아무리 이익이 커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나눌수록 작아지기 때문에… 방향이 중요하다. 이익 대신 니눌수록 커지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인식의 전환(진보?)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4차 산업혁명은 막을 수 없겠지만. ‘교육혁명’을 통한 인식의 방향전환을 이루어야만 할 시기가 지금!?
뉴노멀 시대, ‘더 열심히’는 미친 짓이다 이제 혁신학교의 철학도 낡은 것이 되었다
(파리 박사!)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통섭과 융합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배움이 바뀌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입장벽이 있다. 자본과 기술. 4차산업혁명 시대에도 전자가 더욱 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고도의 기술을 이용한 막대한 자본의 로봇공장…막대한 자본의 투자가 필요한 기술..결국 자본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도…
아이디어와 협력,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자의 필수자격
정작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것이다. 교직이 인기 있는 이유는 교육에 대한 사명감이나 헌신성 때문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퇴근시간이 일정한 직장이기 때문이다.
지식인, 인식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다
상식, 시대가 바뀌면 가치도 변한다
소피아 로젠펠드는 그의 책 『상식의 역사』에서 상식이 구조적 검열의 한 형태로 작동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상식이란 일반화되고 집단화된 문화적 규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들 역시 언젠가는 변한다. 평범한 일반인들은 인류를 지탱해온 기반을 흔드는 복잡한 세계의 등장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에게 이미 익숙한 믿음을 세상에 둘도 없는 진리라고 확인받고 싶을 뿐이다.
꿈, 강요한다고 될 일인가? 진로교육? 미래에 어떤 직업이 없어지고 생겨날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므로 진로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정교육, 이제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 교육은 학교와 가정의 공동 책임. ‘교육 수요자’!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이 갑질을 만들어냈듯이 ‘교육 수요자’라는 단어가 교육계의 머리 위를 맴돌기 시작하면서 교육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교육개혁이 성공한 대부분의 지역을 보면 가정과 지역의 역할을 간과한 곳은 없다.
자신은 교육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아무런 책임의식도 갖지 않고 불만과 비판만 들어놓는 학부모들과 지역이 대다수일 때 학교는 변하지 않고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110 창의성이란 훈련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달음이 있을 때 새로운 상상력이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창의성의 원동력이다…창의성은 지식에 대한 흥미와 열정으로 진지한 탐구를 해나갈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131 이때 수업을 구성하는 기준은 연령이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와 적성이다. 자, 이런 상황이니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 걱정되지 않는가?
과목 구분에 따른 수업보다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수업을 기획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서 수업을 듣는 방식이 더 적합할 것이다(PBL, 프로젝트 기반 수업)
다름을 인정하는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
창의적이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르게 바라보는 경험 자체가 창의성의 근원이 되며, 그래서 학교에서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는 경계를 많이 만들어 낼수록 아이들은 창의적이 되어 간다고 믿는다.
다르게 보는 것은? 다른 것을 인정하면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면 공감이 일어난다. 그런 공감이 강력한 협력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다르게 보는 태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의 진짜 쓸모! 당장의 쓸모를 이야기하는 것은 교육과 인간을 도구화하는 이데올로기다
글을 배우고 깨우치는 것은 생각을 깨는 것.
자본의 음흉한 의도? 교육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제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업인들이 있다! (인재양성의 목적은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을 위해?!)
자본가의 소모품을 길러내는 교육을 계속한다면 학교의 존재 이유는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우리교실의 모습? 과전법 실시 연도가 시험 문제로. 그러면서 과전법이 시행되게 된 배경이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게 문제다.
대학입시에 종속된 고교 교육, 다시 유초중교로 이어지는 입시 열풍..
’어떻게’ 배울 것인가?
혁신학교? 학교가 본래 학교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되돌려 놓는 일?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교육 전문가? 정말 그런지 그럼 우리가 얼마나 교육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아이들의 마음속에 의문과 궁금함이 생기도록 이끌고, 그 왕성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몰입이 가능해질 때 배움이 일어난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윤리의식과 도덕적 태도? 우리의 배움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함께 협력하면서 공공선을 실천하는 삶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어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배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진정한 배움이 가능해진다.
학교에서 제시하고 평가하는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것이 아이들의 재능을 억누르고 창의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단순한 시험? 시험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누구에게 이들이 되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 공격의 진원지는 대부분 학원이다.
대부분 누구나 아는 사실…문제만 지적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또래 친구들과 선생님..이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 공감은 테크놀로지가 대신할 수 없다.
교장, 교감 선생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학생이 변한다. 질문으로 배우게 하라
끝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며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로 가득 찬 살아있는 교실을 꿈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