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269쪽
현대는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 소음 대량생산의 시대이다. 그리고 소음이 이번에는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하면서 끈임없이 거짓 진실들을 생산한다. 세계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소음 기계장치로 변해버린 듯한 시대에, 저자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에 관한 탐구는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과 신에 대한 성찰을 다시 한 번 권유하며, 시원(始原)의 침묵과 진정한 말, 침묵과 신의 말씀과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무한한 침묵의 세계, 침묵의 우주를 가르쳐주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
피카르트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제삼자가 듣기 마련이며, 그 제삼자가 바로 침묵이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침묵은-특히 명상의 침묵은-현재, 과거, 미래를 하나로 만든다. 예를 들면, 사랑은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에 의해서 드러난다.
책 머리에.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한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며…
말이 끝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뿐이다.
침묵의 모습. 침묵은 독자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 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침묵은 효용의 세계 외부에 위치한다. 침묵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침묵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그것은 사물들을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현존재의 세계로 되돌려보냄으로써 사물들은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물들에게 성스러운 무효용성을 준다.
왜냐하면 침묵 자체가 무효용성, 성스러운 무효용성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하나의 원초적 현상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32 인간은 말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온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 침묵은 비로소 완성된다.
육지가 바다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듯이…언어는 침묵보다 강하다.
용서와 사랑을 위한 자연적인 토대가 곧 침묵
진리는 언어의 논리 속에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들어 있다….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주어진 어떤 진리의 확실성을 상기하게 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언어 속에 집어넣는 것 이상의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또한 언어를 통해서 높여진다. 언어는 인간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 속의 침묵. 말과 침묵은 하나의 일체를 이룬다.
41 현대의 우울은 인간의 말 대부분을 침묵과 분리시킴으로써 말을 고독하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침묵의 제거는 인간의 내부에서 하나의 죄책감으로 존재하고, 그 죄책감이 우울로 나타난다. (공동묘지, 죽음을 몰아낸 우리 도시의 풍경, 승효상,『묵상』)
말은 반드시 침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44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죽음의 세계-사이에서 살고 있다.
순결함과 소박함과 원초성을 말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미미한 지속성, 덧없는 사라짐, 허약함 그리고 말이 자신이 명명하는 사물들과 결코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두 번째 침묵, 즉 죽음으로부터 온다.
오늘날 말은 그 침묵의 두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말은 소음에서 생겨나서 소음 속에서 사라진다.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다만 아직 소음이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일 뿐이다.
언어 속에는 또 하나의 침묵,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동적인 어떤 것일 뿐이다. 즉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중지, 그 최후의 끝일 뿐이다. 다 비워버린 생명-그것이 오늘날의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그렇게 죽음을 당했다.
말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말은 망각될 수 있다…말의 침묵에 대한 우월권이 그 때문에 완화되는 것이다.
60 말과 몸짓. “말의 기원을 몸짓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몸짓은 말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다.
몸짓은 결코 말의 투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요한 점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몸짓이 말에 선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몸짓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창조적 행위가 다시 한 번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철저히 존재적이다.
언어는 인간 존재 자체에 속한다.
63 고대의 언어. 황금 시대에 관한 우화들에서는 인간이 모든 동물들과 나무들과 꽃들과 풀들의 언어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언어는 극도로 긴장해 있고 침묵으로부터가 아니라 선행했던 말로부터 나오고 침묵이 아니라 다음 말로 가버린다.
말은 침묵이 자신에게 주는 한계에 의해서 형상화되고 그 형태를 얻는다. 말과 말 사이에 침묵이 없다면, 말은 더 이상 조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개인은 침묵과 마주해 있지도 않고 공동체와 마주해 있지도 않으며, 다만 보편적인 소음과 마주해 있다.
침묵하는 실체는 한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변화의 원인은 정신이겠지만, 침묵이 없다며 변화는 실현되지 못한다.
84 대립을 과장한다. 그들이 그러한 대립을 지나치게 분명한 것으로 만드는 까닭은 현대인의 시선이 지나치게 분명한 것, 노골적인 것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과장되게 표현된 것만을 뚜렷하게 지각하는 까닭에 과장하는 것이다.(자극적인 뉴스 기사 제목!)
진리는 더 이상 말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르지 못하게 되면, 사건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형상은 말하는 침묵이다. 영혼은 사물에 대하여, 정신처럼 말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상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111 그 대양은 미성숙힌 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참으로 단조로워 보이지만, 위대한 영혼은 그 해안에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다.(발자크)
말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단순한 현상 이상의 것이 된다.
동물과 침묵.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말하라! 내가 그대를 볼 수 있도록!” 동물은 자신의 본질을 철저히 자신의 형상으로 드러낸다.
시간과 침묵. 시간에는 침묵이 스며들어 있다.
농부와 침묵.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대기의 침묵이 새들의 날개에 베어지는 소리 같다. 노래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그 내부에 어떤 원초적인 자명한 존재로서 침묵이 내재해 있는 사람만이 침묵한다.
150 오늘날 사람들은 “자연의 정적”과 침묵을 얻기 위해서는 전원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서도 침묵과 만나지 못힌다. 반대로 인간은 거대한 도시의 그리고 자신의 내부의 소음을 시골로 가지고 갈 뿐이다. 그것이 “전원으로 돌아가라”는 운동의 위험이다.
“진정한 동화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고 엉뚱해야만 하고…전 자연이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영계와 뒤엉켜 있어야만 한다…”
180 오늘날 침묵하는 사람은 없다. 더 이상 말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간의 구별이 없다. 다만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사람 간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청하는 사람 또한 없다. 더 이상 경청할 수 없는 까닭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도 없다.
대성당들은 오늘날 버림을 받았다.
침묵이 버림을 받았듯이, 그리고 대성당들은 침묵의 박물관이 되었다…때떄로 대성당은 모든 인간과 동물을 불러들여 소음의 홍수로부터 구원해주는 하나의 커다란 방주 같아 보인다. 대성당 지붕 끝에 한 마리 새가 앉아 있다. 그 새의 노랫소리는 침묵에게 나오라고 침묵의 벽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212 오늘날은 거꾸로 되었다. 먼저 매체가 존재한다. 말하자면 잡음어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잡음어이며 그 잡음어가 사건들을 길러낸다.
228 라디오. 라디오는 순전히 잡음어를 생산하는 기계장치이다. 라디오에는 더 이상의 침묵도, 말도 없다.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점령했다. 침묵은 이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침묵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바로 그 다음 잡음어가 시작되기 이전의 휴지(休止)가 있을 뿐이다.
라디오 잡음은 현실이다. 라디오 잡음을 통해서 모든 것이 인간 속으로 몰래 파고 들 수가 있다.
라디오에 의해서 올바른 인식 방법이 완전히 파괴된다. 독서. 읽는다는 행위는 반복될 수 없는 어떤 것, 살아 있는 어떤 것이다. 독서를 통해서 혹은 한 인간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는 진실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려고 애쓴다.
239 많는 사람들이 라디오의 교육을 받으면 인간이 진, 선, 미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인간은 진, 선, 미를 가져다주는 말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 선, 미가 떠올랐다가 도로 사라지는 잡음어만을 만날 뿐이다.
대도시는 거대한 소음의 저수지이다.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산산조각이 난 한 세계의 잔해에 불과하다.(죽움이 사라진 도시문명! 공동묘지가 사라진 도시)
확실히 하나의 세계로서의 침묵은 파괴되었다. 소음이 모든 것을 차지했고, 이 지상은 소음의 것인 듯이 보인다. 정신이나 종교, 박애, 정치에 의한 세계의 하나됨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음 속에서의 세계의 하나됨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죽은 자들의 세계와 결합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자로서 침묵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을 때뿐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삶의 마지막 잔해, 모두 소진해버린 삶일 뿐이다. 이제 침묵은 결코 죽음의 소유가 아니며, 다만 죽음에게 대여된 것, 동정심에서 대여된 것일 뿐이다.
침묵이 없는 세계.
침묵의 상실만큼 인간을 크게 변화시킨 것도 없다.
인간은 침묵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침묵이 있었던 곳도 이제는 사물들이 빼곡히 차 있어서 빈 자리가 없다.
침묵은 수도원의 밀실에서만 존재한다.(승효상의 수도원 기행, 『묵상』)
신에게는 말과 침묵이 하나이다. 말이 인간의 본질이 되듯이, 침묵은 신의 본질이 된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말이며 동시에 침묵인 것이다.
269 “세계의 현상태, 생활 전체가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이고 그래서 당신이 무슨 충고를 해주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 인간을 침묵에게 데려가라. 이렇게는 신의 말씀이 들릴 수 없다. 그리고 소음 속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소란스러운 방법을 사용하여 신의 말씀을 떠들썩하게 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을 창조하라!”(키에르케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