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탈. 게일 루빈. 703쪽
게일 루빈 선집
#옮긴이 서문_억압된 것의 귀환
역자 또한 불편한 것은 외면하고 생각 없이 대충 살다가 게일 루빈의 「일탈」과 마주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루빈은 40년에 걸쳐 자기 시대와 불화하고 저항해온 결과물을 모아서 두꺼운 선집 한 권으로 내놓았다. 「일탈」은 게일 루빈이 반세기를 살면서 체화한 이론과 실천의 결과물이자, 그녀를 통해 전달된 과거의 정보와 무수한 지식의 축적물이다.
감사의 글
이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실은 논문들은 거의 40년에 걸쳐 쓴 것이다.
나는 도서관과 문사보관소에 열광한다. 그중 두세 군데는 내 연구의 여러 단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특히 도서관 사서들 이름이 열거됨!)…미시간 대학에 있는 벤틀리 역사도서관의 훌륭한 직원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도서관 여행하는 법」)
서론: 섹스, 젠더, 정치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마음대로 만들지는 못한다. 인간은 역사를 자신이 선택한 환경 아래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승된 환경 아래서 만들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 「루이 보니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
31 텍스트, 시간, 공간 텍스트는 특정한 역사적 계기와 가능성이라는 특수한 지평과 더불어 생성된다. 텍스트는 대화, 질문, 가정, 정치적 환경, 이용 가능한 자료, 이론적 자원이라는 레퍼토리의 일부이다. 여기에 수록된 모든 논문은 내가 지난 40년 동안 참여했던 일련의 관심사와 연관이 있다. 젠더, 섹슈얼리티, 권력, 정치, 제도, 그리고 찰스 틸리가 “지속 가능한 불평등“이라고 부른 것들을 다루고 있다.
33 나는 이런 것들이 특정한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있는지, 그에 관한 지식이 어떻게 결합되고 보존되고 전달되었는지(혹은 전달되지 않았는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34 그 당시 내가 몇 살 더 많있더라면 제2의 물결 초기 페미니즘 운동과 만나기 전에 이미 대학을 졸업했을 터였다.
35 그들은 나쁜 친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10대였으며 대다수는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들었던 것들을 학교에서 되풀이했다.
39 이교도(유대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치적 활동가는 전혀 아니었다. 다만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고자 했던 책벌레였을 뿐이다…나는 그 지역 카네기 공립도서관에 비치된 신화와 중세 로망스에 관한 모든 책을 읽어 치웠다.
44 미시간 대학은 나를 교육시켰을 뿐 아니나 사유하고 배우고 탐구할 수 있는 일련의 분석적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남부가 내게 정치적, 사회적으로 성찰하도록 해주었다면, 미시간 대학은 나의 지적 관심사와 학문적 습관을 형성하도록 해주었다.
51 나에게 「여성 거래」는 그 시절의 열띤 대화를 보존하는 일종의 깜부기 불씨와 같은 것이다.
52 이렇게 하여 내 논문은 뜻깊은 지역적 산물이면서 또한 수많은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더 깊숙한 구조적인 변동과 행복한 우연의 결과물이었다. 우연성의 특징은 타이밍이라는 일화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53 나는 ‘섹스/젠더 체계’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부장제는 절망적일 만큼 부정확하고 개념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용어였다.
55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여성의 종속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문화에 의해 생산되며, 그 자체가 생산물이다.
56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역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다. 레즈비언과 게이의 역사 명명법naming은 정말 강력한 도구이다. 언어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정서적 역사를 재해석하도록 해주었다. 나는 페미니스트 동지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고….내가 유혹한 여성은 넘어오지 않았고,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런 참고문헌들이 실제로 미시간 대학 도서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71 문서보관소, 박물관, 도서관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보존하려면 집중적인 노동이 필요하며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전문화되어야 하고 값비싼 노동력도 필요하며…여기서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새로운 수집품을 비치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노동이 들어가는가 하는 점이다.
72 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라면 어디든 헤매고 다녔다…인디애나 대학 소재의 킨제이 학술연구소 도서관까지 순례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게 필요한 자료와 내가 관련을 맺고 있는 커뮤니티 학술제도에 필요한 자료를 모두 수집하고 집적하고 보존하고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 30년에 걸쳐 노력해왔다. 그로 인해 정보를 확보하려면 하부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73 나는 현장 연구를 강요했던 선생님들에게 깊이 감사한다….개발은 그 지역 사람들을 추방하는 거대한 과정의 한 증상이 되었다…나느 가죽 바에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토지 이용 규제에 관한 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결국 성sex은 그 도시의 정치경제에 휘말려 들었다.
81 성적 일탈. 정치적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성 병리학 목록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것은 거대한 도약이었다.
82 이 선집에 실린 논문들은 30년에 걸쳐서 출판된 것이다…따라서 시제tense의 문제가 있다. 각각의 논문들은 제각기 다른 시제에 거주하고 있다…’그때’라는 언급은 상당히 먼 과거일 수 있다.
86 성은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이슈에 비해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된다…하지만 나는 섹스, 젠더, 낙인, 공포가 여전히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놀라게 된다(문화전쟁!)
87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부를 빼앗아 갈 수 있는 방법은 다수에게 자신들의 이익에 상반되는 방식으로 투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과거 몇십 년 동안 인종과 성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에 상반되는 투표를 하도록 하는 특히 믿음직한 수단이었다. 게이 시민 결혼의 ‘위협’은 되풀이하여 효과적으로 투표권자들에게 먹히는 확실한 수단이었으며, 이들 투표권자들이 엄청난 가난, 불충분한 의료 혜택을 가져다줄 정치가들을 투표하게끔 동원되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사진.
88 나는 장차 언제가는 섹스가 정말로 주변적인 것이 되었으면 한다.
여성 거래_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
일탈의 학자, 게일 루빈_옮긴이 해설
681 루빈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쟁점에 관해 논쟁하고 분투해왔다. 그 결과 이 선집에 담긴 루빈의 논문들은 더 이상 현재가 아니라 당대에 관한 서술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루빈의 당대성은 여전히 유효한 현재성을 담보한다. 포르노그래피, 성노동, LGBT 인권, 트랜스섹슈얼리티, 성도착, 성 역할, 아동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오늘날의 주요 쟁점들은 루빈이 논문을 작성했던 바로 그 당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뿌리’라는 말이야말로 루빈의 연구 성향을 특징적으로 드러내지 않나 싶다.
여성학 방법론의 고전, 『여성 거래』
685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관계. 선물 증여는 결속 관계를 강화하며 사회를 구성하는데, 이 가운데 결혼은 선물 교환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되고, 여성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 된다. 근친상간 금기가 족내혼을 금지하고 다른 부족들끼리 여성을 교환하기 위한 선물의 규칙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은 이 선물 교환에 근거한 친족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교환되는 대상이 될 뿐, 교환의 주제가 될 수 없다…따라서 여성 교환 개념은 여성 억압이 생물학이 아닌 사회구성적 산물임을 설명해준다.
686 레비스트로스처럼 여성 교환이 문명의 기원이라고 본다면, 여성 교환이 없다면 문명도 없다. 거꾸로 문명이 존재하는 한 여성 억압은 영원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친족 체계에서 여성이 선물 교환의 주체가 되거나 여성이 아닌 다른 선물을 교환하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692 그녀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근본, 기원, 뿌리를 찾아가고 그 과정 중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주변적 존재를 그저 스쳐 보내지 않고 그들과 진지한 교류를 나눈다. 서지학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조사, 그 과정에 알게 되는 문서 전문가와 서적상과 사서들과의 우정, 현장 연구에서 얻는 지식과 정보, 그 과정 중에 만나게 된 활동가들과의 동지애는 그녀의 이론이 얼마나 탄탄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695 성적인 무지는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공포는 파국적인 성 공황에 빠지게 한다…동성애를 에이즈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오류는 에이즈에 대한 적절한 예방과 치료를 방해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잘못된 인식의 전파에 멈추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법적 지원의 자산마저 장악했다는 데 있다.
700 한국에서는 근래 몇 년 사이에 기독교 보수 세력이 성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전면화. 이들은 동성애가 에이즈를 퍼트리고 있으며, 동성애를 인정하면 근친상간, 수간, 소수성애 등 또한 허용될 것이라면서 성 공황을 유포하고 낙인찍기를 주도한다. 이들의 전략은 루빈이 『성을 사유하기』에서 제시한 성에 관한 사유를 방해하는 다섯 가지 이데올로기를 꼭 닮아 있다.
702 루빈은 ‘변이’야말로 성을 포함해 모든 삶의 근본적인 특질이라고 말한다.
‘변이’는 가치중립적인 생물학적 용어이고, ‘변태’는 낙인찍힌 사회문화적 용어이다. 이 ‘변이’와 ‘변태’를 루빈은 ‘일탈’이라는 용어로 아울렀다.
‘일탈’은 부자연스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혐오스러운 것도,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변이하고 변태하고 일탈한다. 그것은 삶의 속성이다.
당신이 살아 있다면 당신의 변이성과 변태성과 일탈성을 즐겨라. 그리고 타자의 변이와 변태와 일탈 역시 즐겁게 받아들여라.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루빈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