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 승효상. 507쪽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동숭학당(동학?!)
기행지 대부분이 이미 내게 익숙한 징소이더라도, 혹시 다시 새로움을 얻어 달라진 내 모습을 확인하고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을 알게 된다면 이 고질적인 불면의 습관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기대하며 시작한 여행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의(카잔차키스) 묘비에 적힌 글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와, 그때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던 찌꺼기를 도려낸 짜릿한 순간이었다.
수도원에서 3일 밤동안 우선 보시기를 권고해드리는 영화 한 편. 필립 그로닝 감독이 찍은 <위대한 침묵>. 그리고 막스 피카르트가 쓴 「침묵의 세계」도 혹시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우리 수도원 기행은 이 책이 출발점입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은거지인 네 평짜리 작은 통나무집 카바농 답사
31 ‘영성이 실종된 현대 사회의 공간’, 어느 참여 건축가의 설명문에 있는 구절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동학 기행의 성격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32 스물 여섯. 남성 열네 분, 여성 열두 분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무엇을 하든 단체에게 가장 좋은 숫자입니다.
35 여행은 스스로 학습하고 또한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니, 억지로라도 틈을 만들어 기행에 참여하라고 그때 권유했다. 진리를 믿으면 얻는 것이 자유이니, 성경의 요한복음 구절 중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같은 말이다. 진리는 무엇일까. 이 물음은 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에게 던진 말이었다.
청빈과 순결 그리고 순종_수비아코, 티볼리
43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가파르고 좁았다…그 옛날 6세기 초엽에 이 길은 그냥 벼랑이었을 게다. 세상의 끝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신을 찾아 끝까지 간 흔적이다.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삶을 살고자 한 절박함 아니면 도무지 이 벼랑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빌라 아드리아나의 폐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지만, 만약 역사적 지식으로 상상 속 공간을 복권할 능력이 있다면 이 폐허의 현장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건축으로 변해 감탄을 이끌어낸다.
56 도시와 건축이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돌 더미의 폐허에 서면, 원래 모습을 상상으로 복원하고 그 속에 있었던 삶들을 추론하는 일이 흥미진진하지만 그 일의 끝에는 늘 허무가 기다리고 있다.
명료함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_로마
66 모든 신을 모시는 ‘판테온’. 이 건물은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콘크리트는 로마인이 발명한 재료다. 흙, 나무, 돌 같은 자연 소재로만 집을 짓던 만년의 건축 역사를 로마인이 콘크리트를 발명하면서 혁명적으로 뒤바꾼 것이다.
67 판테온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치수가 있다. 43.2미터. 30센티미터를 기준 단위로 써서 12의 배수.
144. 이 건축을 치수로 이야기하자면 완전수의 일종인 ’12×12’로 표기했을 게다… 별자리를 나타내는 황도대의 전체 원을 나누는 숫자가 12여서, 원형의 개구부인 오쿨루스를 천장 정점에 가진 이 건축에는 12가 더욱 특별하다…이와 같은 수치를 지닌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이 건축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격자로 구성된 돔의 패턴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의 원칙이 형태로 나타난 것이어서 모자람도 더함이 없이 또한 완전하다.
폴 발레리가 말했던가. 명료함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연
79 자하 하디드. 지식인적 건축가와 예술가적 건축가. 어디에서든 그녀의 예술혼을 심으며 땅이 가진 사연과 주변의 맥락을 무시하니, 우리 삶이 새겨진 장소의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와는 반대편에 있다.
원래 로마인은 화장을 택해 타고 남은 재를 항아리에 보관하지만, 부활 신앙을 가지는 기독교도는 매장을 종교 의례의 하나로 인식한다.
산 칼리스토 카티콤베. 죽은 자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곳.
순교자. 그들에게는 스스로 삶의 경계를 달리하여 거주하는 곳이며 이로써 평화를 얻은 곳이다. 세상 모든 인연을 끊어 얻은 평화.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100 분명한 것은 건축가는 건축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자다. 그래서 건축가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특별해야 한다.
건축가의 삶은 예수의 삶과 다름이 없었다.
105 기도와 노동. 수도원의 삶.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122 어찌 보면 서양 건축의 양식사가 곧 교회 건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겝니다. 제 생각으로는 고딕 시기가 건축 역사상, 콘크리트를 만든 로마에 버금가는 하이테크 기술의 시대였습니다. 신본주의 건축…결국 인본주의라고도 하는 르네상스 시대로
125 이후 등장하는 바로크와 로코코는 건축의 본질인 공간이나 중력 문제보다는 형태와 장식에 점차 집착하게 되어서, 본질을 놓친 건축과 문화는 19세기 말이 이르러 ‘세기말의 위기’를 겪고 맙니다. 결국 이를 극복하는 모더니즘이 등장하여 현대가 탄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벽체로 지붕을 지지하여 공간을 만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에 매력을…절제할 수밖에 없는 빛으로 벽체로 갇힌 공간의 구조를 드러내게 하는 형식에 나는 전율을 느낀다.
129 시에나. 16세기 전쟁에 패배. 도시 발전을 멈춘 까닭에 오늘날까지 당시 모습. 따라서 지금의 도시가 전형적 중세 도시 박물관인 셈입니다.
클로이스터와 모나스터리
148 언어는 본질. 그래서 사물의 이름을 접하면 이름의 근원을 파악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 이름을 지은 까닭에는 그 사물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어원. 베네딕트 . 베네 ‘좋다’, 딕토 ‘말하다’. 그러니 ‘좋은 말을 하는 사람’ 베네딕토의 뜻)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183 교회 건축이 신의 영광을 더욱 높이고자 인간의 존재감을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하는 것은 2,000년 내내 내려오는 서양의 전통(124 신본주의 건축..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내세우는 인간이라면, 신을 빙자하여 자신을 가장 중요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 인본주의라고도 하는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되는데…)
192 장소에 새겨진 문자. ‘지문‘! 영어로 ‘랜드스크립트’landscript라 하여 내 건축의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다.
199 오체투지 순례자들. 얼굴은 길바닥의 먼지와 어물을 뒤집어쓴 초퉤한 몰골.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있었다. 아, 수도라는 게 말 그대로 길을 닦는 일이구나…온몸으로 길을 닦는 고통을 겪은 후에야 알게 되는 행복인게다.
211 세상의 경계 밖으로, 스스로 추방된 자들. 이 문장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다. 그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쓰며 서양이 오랫동안 지닌 제국주의적 편견을 날카롭게 고발했다. 그가 쓴 다른 책 「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을 정의하길,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라고 했다.
214 지식인은…단도직입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러한 말들로 인해 높은 지위에 있는 친구를 사귈 수 없고, 공적인 명예를 얻지도 못하며,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탈출할 수도 없다. 이것은 고독한 상황이다.-에드워드 사이드,「오리엔탈리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새로운 땅에 내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관습의 도구를 다시 꺼내어 헌 집응 그리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관성적 제품을 만드는 일이며,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을 배반하는 일이다.
그렇다,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지중해변에 위치한 마을들을 보면 바람과 빛이라는 뜻인 ‘풍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르 코르뷔지에. 선생의 배려로 스무 살 나이에 세계의 건축 현장 여행하는 기회를 가진다. 5년을 계속한 이 여행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여행에서 스스로 건축의 본질을 꺠달은 것이다. 글, 그림, 건축, 가구…도무지 못하는 게 없었다. 특히 그는 시대에 탁월한 혜안을… 결국 사후 50년이 지난 2016년 그의 작품 중 무려 열일곱 개의 건축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르 코르뷔지에 묘지. 나는 이 묘지를 ‘죽은 자들의 거주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떠난 2014년 동숭학당 기행 때 비로소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카바농. 코르뷔지에는 스스로 지은 네 평짜리 오두막집에서 8년이나 홀로 기거해왔다. 고독 속 사유는 그의 일상이었으니, 바로 한 달 전 파리에서 쓴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 전해지는 것은, 우리들 고귀한 노동의 열매인 사유뿐이다. 이 문장은 그가 자신의 최후를 미리 계획한 후 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중해 수영하다 사망. 추측건대 르 코르뷔지에는 이제 카바농에서마저 자유하기로 결심하여 그가 평생을 그린 지중해, 수평선 아래로 스스로 추방당한 것 아닐까…
헤테로토피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만든 말. 여행지나 놀이공원 같은 비일상적인 공간을 가리키며 실제화된 유토피아라고 했다. 이 곳 생 폴 드 방스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다. 그래서 여기에는 외부자들이 일상에서 탈출하여 들어와 거주한 흔적이 수없이 많다. 피카소, 샤르트르,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 그리고 마르크 샤갈, 샤갈의 미술관도 여기 있지만, 특히 풍경화가에게 성소로 여겨져서 수많은 이가 방문한다.
도심 속 성소. 굳이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더라도, 성소를 곳곳에 만들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영성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고 시에 제안.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번잡한 곳만이 아니라 경건한 영역이나 시설이 있어야 도시의 지속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경건한 곳이라면 죽음이 있는 무덤만한 곳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묘역을 부동산 시세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도시 밖으로 모두 쫓아내어, 마치 죽음을 모르는 양 일상을 산다. 오래된 도시들을 보라. 오래된 대부분의 도시는 무덤을 가까이 두어 늘 죽음을 보며 일상을 살기에, 그들은 지금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안다.
묘역은 사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거기에 죽은 자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무덤은 죽은 자가 아니라 남은 자를 위한 곳이며 산 자인 우리에게 절실한 시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를 혐오 시설이라며 버렸다.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을 버리는 행위와 같다.
진실에 대한 증언
288 어느 날 문득 나에게 ‘빈자의 미학’이 도둑처럼 왔다. 나는 안다. 언어는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내게 오는 것임을…그때는 막스 피카트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기도 전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했다. 절박함 끝에는 늘 침묵이 있기 마련이며 그 침묵을 견디면 진정한 언어가 온다는 것이다. 빈자의 미학, 다시 말하면 내가 죽어서 다가온 언어였으며 나를 평생 쫓아다니는 존재가 베푼 은혜였다.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308 기독교는 어떻게 보면 예수가 만든 게 아니라 바울이 만든 종교일 수도 있다.
309 그러나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필사본 성경은 구하기도 힘들지만 그리스어나 아람어로 쓰여 이교도가 읽기에 어려워, 기독교 교리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림이나 성물이 유효한 전달 매체였다. 따라서 이런 물건들 제작이 성행할 수밖에 없어서 급기야 기독교의 본질보다 성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 점차 커지게 된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듣는 것이 시작되며, 언어가 사라질 때에만 보는 것이 시작된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모나스터리, 스스로 작은 방에 갇혀 평생을 침묵 속에 오로지 성경 필사와 찬송으로 보내는 수도사의 공동체. 필립 그로닝의 『위대한 침묵』, 러닝타임 2시간 49분, 대사가 거의 전무하며 소리는 간혹 들리는 성가가 전부. 긴 러닝타임이 내게는 눈 깜짝할 사이. 이 수도원 건축에 관해 알고 있던 차였고 수도원 평면을 떠올리며 수도사들의 동선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영화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수도사들의 침묵이 마치 그들의 언어처럼 들리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침묵은 말에 속하며 그 침묵을 통해서 말은 건축으로 나아간다는 막스 피카트르의 또 다른 말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다. 수도사들의 침묵은 바로 그들 영혼이 건네는 언어였고, 그들이 기거하는 공간의 형식은 그들 영혼의 존재 방식이었다.
가진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29 마테오라의 발람 수도원. 애초에 수도하고자 세상을 버리고 광야로 나간 수도사들이 절벽 동굴을 찾아 기거한 게 수도원의 초기 형태였다.
박물관. 이 수도원에서 제조한 독주를 판다. 69도 증류주. 가장 순수한 액체. 스피리츠spirits…러시아인에게 보드카는 바로 영혼입니다.
339 학자와 작가의 차이? 학자는 아는 것과 읽은 것을 말하지만, 작가는 믿는 것과 느낀 것을 말한다.
나는 저승을 믿지 않는다
역시 시간은 최고의 건축 마감 재료다.
406 존 B.잭슨 『폐허의 필요성』. “폐허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근원을 제공하며, 우리로 하여금 무위의 상태로 들어가 그 일부를 느끼게 한다.”…다른 말로 하면 건축과 도시의 종착점이 폐허라는 것이다.
역사는 중단함으로써 존재한다.
418 이제민 신부. 『카톨릭뉴스 지금여기』 2012년 게재된 강의록. “…나는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마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에 묻힌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부활했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살아 있는 동안 내 인생에 ‘사후’가 발생하게 될 때 새 하늘,새 생명, 새 세계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새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이런 면에서 부활은 깨달음의 문제다. 살아 있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기에 그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없는 것은 죽은 자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이치를 깨달아 새 삶을 살도록 하라’라는 것이다….”살아서 나를 믿는자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11장26절)
나는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떠신가? 저승을 믿지 않는다는 그가 고백하듯 말하는 부활에 대한 생각,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 아…그의 말이 내 정수리를 때렸다.
건축은 빛 속에 빚어진 매스의 장엄한 유희
434 밤새 생각한 것 중 하나가 꽤 많은 이가 기독교와 천주교, 개신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문득 깨달았다. 물론 교회와 교회당, 성당 등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듯해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교회.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 그러니 교회는 건물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부름을 받아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이들을 위한 건축이 교회당인 겝니다.
436 예수는 좌파다.
요즘 말로 하면 극렬 좌파.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일갈했으며, 어둠에 처한 자와 가난한 자, 과부, 고아, 이방인을 껴앉으며 사랑했다. 철저히 반체제 인사였으며 민심을 교란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혁명가요, 사상가였으니 늘 세상의 경계 밖에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440 정기용의 여행 준비. 인문 지리서 같은 지도
446 르 코르뷔지에와 롱샹 성당. 거주하는 기계. 그를 모더니즘의 창시자며 완성자라 했다. 기계 미학에 심취하여 직각만이 유일하고 불변한다고 한 그의 건축은 늘 직각의 육면체여야 했으며, 이성은 그 속에서 번뜩이며 오만하게 거주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 문명이 인간의 살육을 대단히 효과적으로 돕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직각의 기계를 떠난다.
449 이 롱샹은 그를 교주처럼 따르던 모더니스트들에게는 뼈아픈 배반이어서 그의 변절을 통절히 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68세의 코르뷔지에는 95세의 노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토요일 롱샹에서는 모든 것이 장엄하게 흘렀습니다. 온갖 환희가 있었고, 아름다움과 영적 웅장함이 넘쳤습니다…이 건축은 오랫동안 만들어온 것 중 가장 혁명적인 건축입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462 순례. 그 과정에서 이미 순례자의 고통과 번민, 불안과 근심, 증오와 시기, 욕정과 탐욕, 오만과 분노가 모두 해소되었을 게다. 그러면 그 순례의 끝에서 얻어지는 건 고요밖에 없다. 그게, 내가 도달하지 못하는 피안이라서 그렇다. 나는 고요, 이 단어를 참 좋아한다.
공간이 건축의 본질이며 건축은 우리 삶을 구축하고 지속시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사유원’이라는 수목원.
470 번창하면 다시 위기를 맞는다…세속 권력과 결탁한 수도원의 운명은 뻔했다…전쟁에서는 늘 공략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어 백 년 전쟁이나 종교 전쟁에서 첫 번째로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으며
484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영향. 이제는 그의 영향을 넘어 삶의 한 방법이 되었다. 전례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이 떠나는 순례길,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자, 그래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떠난다고 하는 그들이 그 끝에서 공통적으로 얻는 건, 아마도 평화일 게다.
여행은 대개가 자발적 이방인이 되게 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성질이 있지만, 이 기행에서 느낀 것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저의 헛된 욕망과 질투, 오만과 분노와 나태를 당신의 십자가 위에 못 박아 죽게 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리베라 메 Libera me, 리베라 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진리가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