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을 위하여. 박완서. 385쪽
소설. 허구의 문학?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이야기? 진경소설!
그리운 마침표
1999년 ‘작가의 말’에 “수준작이건 타작이건 간에 기를 쓰고 그 시대를 증언한 흔적을 읽는 것도 나로서는 흥미로운 일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 한 문장이 어머니 문학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 같다.
작가의 말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94 “그 활기라는 게 바로 스캔들의 힘이야. 사람들은 일단 스캔들의 편을 들게 돼 있구. 섭섭해하지 마라.”
반듯한 집안 타령…이회창 찍어야지…(반듯한 친일 후손 집안?!)
“그검 아니야. 처음부터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후보가 있었던 게 아니니까. 아무가 돼도 세상이 달라질 게 없다는 정치적 무관심이 집에서 살림 사는 일까지 맥 빠지게 하는 것 같아. 가뜩이나 재미없어죽겠는데.”
107 모든 인간관계 속엔 위선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돼 있어. 꼭 필요한 운활유야.
180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216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 상식은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생각이 단순하게 정리되더라고. 그래서 내려온 거야.
261 농촌이라지만 농사꾼은 없어서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들어가고자 한 곳은 고향땅이 아니라 고향 인심이었나보다.
287 ‘그 옛날의 광영은 지금 어디에’
아, 그 배고프던 그 시절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노인들이 애타게 찾은 그 옛날의 광영이 그럼 배고픈 시절이었단 말인가.(풍요로운 가난? 공생적 가난의 시대)
296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그렇게 텔레파시가 통하게 돼 있는 거 아닌가요. 연애도 아마 그 재미에 했을걸요. 그게 안 통하고부터 우린 서로의 사랑을 의심했고 같이 살 까닭도 못 느끼게 된 거죠.
##해설_‘그리움’이라는 생의 송가_정홍수(문학평론가)
박완서는 자신의 글쓰기가 증언의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소설이라는 허구의 마당에서 좀더 자유로운 ‘증언’의 형식을 찾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작가가 토로한 ‘증언의 욕구’를 통상의 문학적 수사나 주관적 의지의 영역에서 빼내어 박완서 문학을 정초하고 구성하는 내적 형식으로 호명하고픈 마음이 든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박완서 문학에서 증언의 핵심은 6·25 전쟁 체험이다. 이 체험의 실체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는 한 문장 안에 가늠할 길 없는 무게로 얹혀 있다.
372 박완서 문학이 증언의 자리를 고수하려고 할 때, 자기 정직성은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박완서 문학에서 자기 정직성은 기억과의 싸움으로 현상한다. 밀어내고 싶고 떨쳐버리고 싶지만 낱낱이 떠올려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그 ‘싸움’은 언제든 새로운 진실의 형식을 요구한다.
아마도 그 진실의 형식을 찾아 내는 과정이 박완서에게는 소설쓰기였고,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375 이야기가 담담히 술회될 때 우리는 삶과 문학 사이의 빗장이 풀어버린 박완서 문학의 진경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적 진실과 체험적 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비슷한 상황이 『엄마의 말뚝 3』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