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서중석. 419쪽
친일파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적이었다.
20세기 100년의 역사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지배자의 국가관과 민중이 갖고 싶었던 나라가 확연히 달랐다. 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이 추구하는 바가 같았다.
20세기 현대사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잘 말해준다.
이승만·박정희 유산은 쉽게 청산되지 않았다.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가 컸고, 2007년 대선에서는 성장제일주의 앞에서 민주주의나 정의감, 양심이 얼마나 쉽게 마비되는가가 입증되었다.
건국절…단정부 수립 60주년…’이승만 건국’을 찬양하며, 광복절 대신 건국절 제정 주장…단정운동을 찬양하고 단정운동에 참여한 친일파를 건국공로자로 모시자는 주장…이는 친일파의 위력을 실감케 했는데. 해방 이후 처음 나온, 역사관이 뒤집혀져도 완전히 뒤집힌 해괴한 논리였다.
일제가 만들려 한 국가, 한국인이 세우려 한 나라
3·1운동. 전국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일어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집회 또는 시위는 전국 211개 부·군, 그리고 서·북간도와 사할린 등지에서 1,542회 일어났다.
일제의 한국 지배정책은 백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다른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해방 직후 여운형의 국가 건설 방향
-인민공화국·인민당·신탁통치 문제를 중심으로
여운형은 좌우합작에 의해서만 통일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확신했고, 좌우합작으로 심상회의 결정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반드시 임시정부수립이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해방 후 남북 주요 정치세력의 국가 건설 방안
해방정국…한국은 초기 부르주아국가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심한 체제경쟁에 즉각 돌입. 근대적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경쟁에 들어간 것이다.
토지개혁. 토지 문제는 ’12월 테제’에서 질적 비약을 보였다. 이 테제에서는 “조선에서의 혁명은 토지혁명 이외에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1930년대 이후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대개 ’12월테제’의 이러한 규정을 따랐다.
친일파 처리 문제만은 극구세력만이 입장을 달리하였다. 이것은 왜 극우세력이 분단 지향적인 정치활동을 하였는가를 설명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이승만의 단정운동·반공국가와 여순사건
당대 남한의 축소판이자 남한 현대사의 축소판, 여순사건
해방 후 지도자들의 좌우대립을 지켜본 한국인은 분단되면 남북 간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심해질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극좌극우가 각각 강대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두려워했다…“저절로 민족 상호의 혈투가 있을 뿐이니, 내쟁 같은 국제전쟁이요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 필연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건국설의 오류. 1948년 두 (분단) 정부가 세워진 이래 대부분의 한국인은 분단은 미소의 냉전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고 생각했다…이승만은 분단시킬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4월혁명 이후 새나라 건설 방향과 혁명입법
허정과도정권의 기본 정책과 이승만·자유당 청산 문제
1960년 4월 26일부터 1961년 5월 16일에 이르는 시기는, 해방 직후를 제외한다면,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의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자유가 많았던 시기였고 풀어야 할 난제가 수북히 쌓인 시기였다.
허정과도정권이 이승만·자유당체제를 청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허정은 이승만이 가장 신뢰한 측근의 한 사람이었고, 과도정부의 관리나 경찰, 판검사는 거의 다 이승만정권하에서 복무했던 자들이었다.
‘부정축재처리 특별법안’은 특히 오래 끌었다…장면은 허정처럼 부정축재자 처리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의 활동
특별검찰부는 그 구성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흡사 해방 후의 반민특위가 천대받던 그대로군”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활동기간이 34일 정도. 이 짧은 기간에 정부의 홀대를 받으며 피의자를 체포해 심문하고 관계 증거를 확보해 기소해야 했다. 처음부터 특검활동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경찰 숙정. 경찰은 3·15부정선거뿐 아니라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부터 모든 선거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승만정권을 경찰 정권이라고도 불렀던 데서 짐작되듯이, 경찰은 부패하고 비리가 많았던 이승만정권 수호의 첨병이었다.
장면정권은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맞으려는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보수반공적이고 냉전적 사고에 찌들어 있다는 점에서 이승만정권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범람과 횡포를 낳았다.
이승만정권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악명 놓은 ‘언론 조항’을 삽입한 바 있는데, 장면정권은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에 약간 손댄 것을 제외하고는 언론 규제는 감히 생각조차 못 했다…이들은 과장·왜곡 보도하기 일쑤였고, 특히 정쟁을 부추겼다. 언론은 비난을 퍼부어야 주목받았기 때문에 장면정권의 실정과 무능을 쉬지 않고 보도했다.
부마항쟁과 박정희 유신국가의 말로
한국인이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인권을 사랑한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불굴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은 학생운동이나 소수 명망가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도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그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 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80년대의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라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도래를 예고하고 향도하였던 것이다. -『부산민주운동사』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투쟁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본인이 직접 내려가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중요 시위나 투쟁은 이처럼 의외의 사태 발생이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일반적 현상이다.
경제적 동인. 박정희와 유신체제가 붕괴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경제 문제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박정희의 치적 하면 대부분 경제발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공화당 위에 재벌 있다”
유신 붕괴 전해인 1978년 12·12 총선에서 지독한 독재를 휘둘렀는데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패배한 데에는 1977년부터 시행된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 피해, 재벌·특권층 중심의 경제 운용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10월 18일 부산대에 뿌려진 ‘선언문’은 특히 경제 문제와 사회 부조리를 이렇게 집중 성토하고 있다.
특히 고도성장 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그뿐만 아니었다…극심한 소득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부마민중항쟁은 김재규가 말한 대로 민란이나 봉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난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는 그대로 놔두었고 흉기도 지니지 않았다…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대참극의 예방.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쏘기로 결심한 것은 부마항쟁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다.
부마사태를 초래한 정치적 계기나 경제적 동향은 부산·마산만의 일이 아니고 전국적인 현상으로 다른 지방도 비슷했다.
차지철도 그렇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안위에 관한 중대한 사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성격이 아니었다…박정희와 차지철의 성격과 권력남용 형태를 볼 때, 특히 유신 말기에 보인 비정상적인 면을 볼 때,…대참극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굴곡은 있었지만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정권, 박정희 유신정권, 전두환·신군에 맞서 끊임없이 민주화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에서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각별히 소중한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부마항쟁의 경우 발발했을 때에도 보도통제로 다른 지방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다른 반유신 시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컸고 폭발적이었으며, 1960년 4월혁명 이후로 잡아 보더라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친일파가 만들려 한 국가
한국은 친일행위 또는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두 차례 가졌다. 첫번째로 해방을 맞아, 두번째로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찾아왔다.
해방. 친일파 청산을 실패로. 미군정이 친일파를 보호하고 육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적극 비호했고, 해방된지 얼마 안 돼 생존 본능이 뛰어난 친일파들이 사회 각계에서 암약하였으며, 반공국가가 출현하면서 강고한 세력으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극우세력은 오늘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미군정의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발언
친일파와 반공주의. 미국과 이승만이 친일파 처단을 반대한 이유 중 하나가 반공인데, 친일파들은 반공을 내세워 자신들에 대한 처단을 무력화시켰다. 친일파의 반공주의는 그 이후 반공주의와 성격을 같이하고, 그것은 극우반공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친일파가 만들려 한 국가?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유신체제
역사의식 도착, 가치관 혼란의 주범은 친일파의 반공주의, 즉 극우반공주의였다. 반공이 서슬 퍼런 국시인 세상에서는 진실은 알아서도 안 되고 말해서도 안 되었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이었다.
과거사 청산과 새로운 출발
과거사 청산으로 새로운 출발을
진정한 화해와 갈등의 해소는 과거사 청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제주도의 경우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1987년 6월항쟁이 있기 전까지는 청년층만 해도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부친이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6월항쟁 이후에야 알았다는 증언들도 나왔다…이제라도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해 과거사를 올바로 기억하고 참회하여 밝고 투명한 미래를 열어야겠다. 과거사 청산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