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권정생. 371쪽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선생님을 알게 되어 이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선생님 작품은 마음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시라고 느껴집니다
살구꽃 봉우리를 보고 눈물이 날 뻔하였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산골 학교로 전근.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만 그런 대로 산에 정을 붙이고 살고 싶습니다. 권 선생님을 생각하면 불편이고 뭐고 너무 사치한 소리입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이젠 외롭지도 않습니다.
『아동시론』을 이틀 저녁 다 읽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두고두고 읽을 생각입니다. 먼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선생님을 가난한 우리 나라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완전히 어른들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도시 아이들이 오히려 불쌍해집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지도층, 이 나라의 어버이들은 다 한번씩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읽고 반성을 해야합니다.
제 동화가 돈과 바꿀 수도, 상을 탈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온종일 있어도, 아무도 없는 날이 더 많기 때문에 책은 유일한 저의 친구입니다.
잠시도 선생님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멍하니 앉았을 때나 길을 걸으면서도. 정말입니다. 선생님의 백분지 일도 따르지 못하는 저의 생활과 사고방식이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도 보고 들으시겠지만, 농촌의 그 순수한 생활 모습도 많은 변화가 있어 자꾸 정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당도 블록으로 담장을 쌓아 버렸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담을 쌓는 가장 죄악의 씨라는 것,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병원에 가 보면 주장 영양 섭취를 많이 하라고 하지요.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1년에 한두 차례는 병원에 가 봅니다. 종합진단, 투약, 심신 안정….도리어 병을 얻어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도 바보이지만, 번연히 알고도 못 하는 건 더 바보가 아니겠어요.
솔직히, 저는 아직 누구에게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을 받아 보지도, 개인적인 지도도 못 받았습니다. 독학이란 어려운 것뿐만 아니라, 퍽 위험한 행위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만이 위로해 줄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이 도와줄 수 있답니다. 신 김치일망정, 쓴 된장일망정,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를 찾아오는 가난한 이웃들을 저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돈이 생기게 되면, 건강해진다면, 사회가 알아주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것을 잃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싫답니다.
조금 아까, 시장에서 구둣방 하는 태수가 와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 돈을 별별 수단을 써서 다 긁어 간다”고 하면서 한참 동안 투덜거리다 갔습니다.
선생님 글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제일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도 사전을 펼쳐 놓고 봐야 되니, 글 한 편을 쓰는 데야 말할 나위 없지요. 그래도 자꾸 틀립니다. 어려운 말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쉬운 말로 쓰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계속 글은 쓰겠습니다. 앉아서 배길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무엇이곤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니까요. 아무와 얘기할 것이 없으니, 자연 책에 눈이 가고, 하고 싶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
제목 때문에!
저의 ‘강아지 똥’이 겪은 설움을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모두 그걸 싫어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요? 우리 아동문학 풍토가 기름지게 되자면 이런 것도 시정되어야 할 거예요. 각자가 자기자신을 돌아보라고 해 보세요. ‘강아지 똥’만큼 한 가치라도 지니고 있는지요?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설교했지만, 저는 한 덩어리의 오물(거름)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제목을 싫어하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곤고할 때, 선생님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어쩐 일로 풀벌레 소리도 드물게 들립니다. 농약으로 벌레들도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배추밭에는 벌레를 찾아오던 새들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참 서글픈 세월이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찾아오시지 않아도 항상 제 곁에 계신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은 오고 마니까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하루도 기다리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요. 선생님은 찾아오시지 않아도 항상 제 곁에 계신답니다.
저는 지금 계속 동화를 보고 있는데, 두어 편 더 평문을 써 놓고 다음에 동화 평론을 쓰려고 합니다. 동화는 그래도 몇 사람쯤 쓰는 사람이 있는데 동시는 정말 무인지경이라 할까요, 참 엉망입니다.
절대로 함부로 책을 공짜로 주지 마십시오. 그냥 준다고 좋은 것 아닙니다. 피땀 흘려 만든 책인 것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아동문학상) 상금에 세금이 나오지 않는가 염려되는데…
사실 병들고 가난하게 겨우 목숨을 이어 가는 작가에게 국가에서 밥 한 그릇 먹여 주지 않으면서 세금은 또 무슨 세금이겠습니까. 그런 것 못 내겠다, 낼 돈 없다고 거부하고 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선생님만은 그럴 수 있습니다.
모두 마음만은 좋은데, 만나 보면 대화가 막혀 버립니다. 역시 생각(사상)이란 것인 인간관계를 이어 주는 모양입니다.
방세쯤 목돈이 아니면 제가 걱정해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시골엔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하늘이 맑아서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수영이네 어머니가 고사리 뜯어러 갔다가 호랑이를 보았답니다. 늑대가 앞산에까지 내려오고, 재락이네는 마당에 들어온 꿩을 손으로 꼭 붙잡았다고 합니다. 산짐승들이 사람을 그리워해서 나타나는 것 같아서 저 혼자서 흐뭇했습니다.
어떤 슬픈 일이 닥쳐도 참고 기다려 보겠습니다.
일직에도 벌써 자동차 공해가 심해요. 먼지가 많아졌으니까요.
부디 이 겨울만 견디어 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몸이 더한층 악화되신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하겠습니다. 혹 경제적인 사정은 아닌지, 좀 솔직히 얘기해 주세요. 몹시 걱정입니다.
옷도, 속옷 겉옷 필요 없이 자루처럼 하나만 입고 음식도 하루 세끼는 너무 많아요. 한 끼만으로 살 수 있게, 그리고는 잠들지 말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않자 있고 싶습니다.
선생님과 자주 만나 공부하고 싶지만, 거리가 너무 멉니다.
동화에 대한 ‘교육성’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동시니 동화니 하는 것을 쓰는 사람들,..사람들의 하고 있는 일이란 참으로 한심스럽지요.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런 불순물이 다 씻겨 없어질 것입니다. 고독을 영관으로 하는 지혜를우리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는 식사에 대해 저 나름대로 정했습니다. 병원, 의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환자에게는 절대 육식이 해롭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쌀밥과 달걀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태까지 죽지 않았던 것은 쌀밥을 먹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누구한테라도 채식을 적극 권해야겠어요. 잡념을 없애고, 깨끗한 머리를 가질 수 있고, 쉽게 피로하지 않게 하는 비결은 채식입니다.
몇 해 동안 구상해 오던 동화의 서두가 열려서, 이젠 죽음을 무릅쓰고 써야겠습니다.
글을 씀으로써 모든 불순한 것들에 저항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무지개 색깔이 일곱 색이 아니라 열네 가지도, 스물여덟 가지도 넘는다고 저 혼자 고집 쓰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제 주장을 이해해 주지 않던 선생님이 원망스럽고, 외롭고 안타깝던 심정처럼 지금도 꼭 같습니다.
생활에서 도피한다는 것, 저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활이 없이 어떻게 글을 씁니까? 제 동화가 무척 어둡다고들 직접 말해 오는 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꿈 같은 얘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잘못된 교육은 인간의 결함을 숨기려는 데서 비인간화시켜 버린다고 봅니다.
제 몸에 병이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다면, 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새벽 종을 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생산이라는 것, 소유라는 것, 그리고 내 것을 나눠 준다는 자선이란 말들이 쓸데없는 빈말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가진 것을 ‘준다고’ 하지 말고, ‘되돌려 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한다는 말은 아예 버리고 ‘받는다’는 말이 옳겠지요.
우리 자신이 햇빛을, 공기를, 물을 생산한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바람과 세계입니다. 절대 천 원짜리 지폐나 하나의 손가방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악이 승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지금 ‘용기’ 하나뿐입니다. 독립운동가 박열이 말한 ‘굵은 조선인’은 저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햇볕이 앉을 곳도 없는 그곳에서 얼마나 추울까요.
농촌을 지켜 나가는 굵고 튼튼한 아동 시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자에 대한 예우는 인세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의 저항 의식이 살아서 움직여야만 국가는 병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일만 송이의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선생님, 자신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앞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마음대로 정하지 맙시다. 어떤 구실로도 인간을 구속하는 정치나 도덕을 과감히 쳐부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만이 가장 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권 선생님 편지 보고, 그렇게 돈이란 걸 잊어버릴 수 있는지, 참 놀랍고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모든 물질적인 욕망을 끊어 버리는 데서 아동문학의 정신이 싹트는 것이라 봅니다.
(텔레비젼) 보고 듣는 것이 모두 그런 것뿐이니 어떻게 그 애들도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이들뿐만도 아닙니다. 어른들도 전쟁물과 권투 같은 폭력을 아주 좋아하고 있어요.
쌀밥 먹고 고기 먹고 나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더 괴롭습니다.
겨울이 추워서 오히려 좋습니다. 따뜻한 건 싫습니다. 아주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는 한 실컷 춥고, 배고프고, 외로워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훨씬 좋은 거지요. 굶주림만 없다면 가난해져야만 해요.
이오덕은 2003년 8월 14일에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검사도, 치료도 받지 않았다. 마지막에 머물렀던 무너미 마을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일기를 쓰고, 시를 쓰며 하루하루 살았다. 2003년 8월 25일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용감하게 죽겠다-권정생.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