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속의 ‘기억’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가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이다.
『노자』(도덕경)을 읽을 때 우리는 노자라는 한 역사적 인간을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유의 산물임으로 그 사유의 주체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이 추상적 사유의 체계 자체만으로도 적확하고 충분한 이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논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논어』는 논이요, 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논과 어는 반드시 그 논어의 주체자인 한 인간의 모습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읽히는 논어인 것이다. 『노자』 속에는 노자가 없다. 그러나 『논어』 속에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시공의 맥락에 따라 논하고 어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맹자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소설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공자세가』라는 소설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는가 하는 것이 결국 『세가』 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 상황인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공자나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오의 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은 『논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 이천여년을 묵묵히 흘러내려온 『논어』라는 의미체계, 이미 역사속에서 수없는 인간들의 의식의 장속에 실체화되어버린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라는 텍스트는, 이미 그 오리지날리티의 시비를 떠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공자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Return to the Analects!
『논어』 그 자체로의 회귀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를 논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느낌”일 뿐이다. 논리도 느낌의 반복적 정형일 뿐이다. 언어는 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의 총체성을 전달키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