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집3.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 522쪽
476-496쪽.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
씨알 중에 지극히 작은 씨알의 하나인 이 사람은 부끄럼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감히 3천만 겨레와 이 나라 정치를 스스로 맡아 하겠다고 나선 박정희 님 이하의 재건최고회의 여러분과 민족문화의 지도자인 지식인과 나라의 울타리인 군인과 겨레의 내일을 맡을 학생 여러분 앞에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누가 말을 해도 하기는 해야겠는데 다들 잠잠하고, 어디서 꿈틀하기는 해야겠는데 그저 죽은 듯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주제넘게 말을 하는 까닭입니다.
#박정희 님에게! 남은 길은 공약 준수뿐
나라를 바로잡잔 목적은 좋았으나, 수단이 틀렸습니다. 그리고 수단이 잘못될 때 목적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여러분은 나라의 기본 되는 헌법을 깨치고 직접 정치에 손을 댔을 때 후에 올 수 있는 모든 군사적 동란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지금의 민중은 영웅의 휘두름을 따라 폭동을 일으키던 옛날의 군중과는 다릅니다. 저들은 자각해가는 인간이므로 이론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혁명의 공을 세우기에 너무 급급하여 여러 가지 수단 방책을 썼습니다. 공을 세우기 급해하는 것은 따지고 들면 결국 영웅주의입니다. 속에 영웅주의가 있으면 모든 애국은 결국 가면밖에 아니됩니다. 민중은 마침내 그것을 알고야 마는 법이요, 알면 버리고 갑니다.
#정치인들에게! 민중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때를 아십니까? 국민은 어떤 마음으로 여러분의 하는 일을 보고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무감각한 듯한 민중의 가슴 밑에서는 심지의 타는 소리가 바작바작 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싸움이 그리 많고, 무슨 흥정이 그리 깁니까? 이제 싸우고 흥정하고 있을 땐 줄 압니까? 언제까지라도 민중을 팔며 그러고 있으렵니까?
미운 것은 군인이 아니고 여러분입니다. 아니 나섰으면 또 모르지만, 이미 나선 바에는 어찌 그리도 사람이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까? 그렇게도 인문이 없단 말입니까? 칼은 반드시 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깃덩이밖에 아니되는 짐승에게는 폭력밖에 무서운 것이 없지만, 사람은 뜻에 살고 의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가 기울어집니다…집은 버리면 다시 지을 수 있지만, 나라는 넘어지면 다입니다. 그럼 어쩌나? 큰 제목 없으면 작은 제목을 무어 대서 써야 하고, 큰 인물 없으면 작은 너와 나를 한데 묶어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들어주십시오. 그밖에 길이 없습니다…재주나 경험에서 여러분을 나무라는 것 아닙니다. 왜 믿음성 있게 해주지 않는가 말입니다. 각자를 죽이고 하나로 뭉치면 여러분의 재주를 가지고고 족히 나라 할 만합니다.
#지성인들에게! 모두 진정(眞正)을 말하라
이게 무슨 일입니까! 20세기의 문명의 한길에 대낮에 어둠이 덮여왔습니다.
여려분은 말만 아끼지 않으면 됩니다.
입을 크게 열고 붓을 날카롭게 하여 여러분의 진정을 말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그의 마음에 계시가 되고 그의 눈에 빛이 되어 그는 제 잘못을 뉘우치고 새 믿음을 얻어 잃었던 힘을 대번에 도로 찾아 우상의 전당을 그 뿌리째 흔들어 저들로 하여금 제 쌓은 거짓의 전당의 무너지는 밑에 깔려 자업자득으로 영원히 멸망하게 할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이제 어쩌렵니까? 종교가들 여러분은 마음은 갸륵한 줄 압니다만 생각이 너무 좁습니다. 3천만이 벙어리 되고 앉은뱅이가 되는데 기도는 무슨 기도를 한다고 불단, 성당, 기도원, 바위 밑에 중얼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나라의 구원을 내놓고 또 무슨 구원이 있단 말입니까.
신문인들 왜 그리 비겁합니까? 닭은 길러서 새벽 울음 한 번 듣자는 거요, 돼지는 먹여서 제삿날 한 번 잡자는 거요, 신문 잡지는 해서 필요할 때에 한마디 하자는 것입니다. 새벽이 와도 울지도 않고…말을 할 때에 하지 않는 언론인도 못쓸 것입니다.
예술인들 꾸며내서 하는 연극, 소설, 음악, 춤만 하지 말고 실살림으로 하는 연극을 하십시오…가난한 민중은 돈 주고 보고 듣는 가짜 예술에 참여할 새 없습니다.
교육자들 데모크라시는 아니 가르치고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부지런해라, 친절해라, 겸손해라, 누구에게 누구위해 하란 말입니까. 주체를 잃어버린 도덕은 종의 도덕이요, 도둑놈의 도덕입니다.
주체가 누굽니까? 이 민(民)이지, 씨알이지.
지성인의 할 일은 첫째는 분간하는 데 있습니다. 긴 듯 아닌 듯 한 것을 갈라놓아야 합니다. 겸손 밑에 숨는 야심을 지적해내야 합니다. 눈물 속에 숨는 음험을 보아내야 합니다.
둘째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시비를 알았거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시(是)를 주장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 없는 것은 사람 아닙니다.
셋째는 결단을 했거든 행동해야 합니다…지식은 잘못을 합법화하고 죄악을 정상화하는 데 쓰잔 것 아닙니다.
이제 필요한 한 가지 일이, 단 한 가지 일이 여러분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민주의 여론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군인도 야당 정치가들도 다 나라 건질 실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싸움을 끊지 않을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정치가 혼란을 줄수록 밖을 지켜주오
사실 반공이 국시란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무식해서 한 소리입니다. 국시란 그런 것 아닙니다. 반공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한 나라는 공산주의가 없어지는 날 그것도 없어질 것입니다. 국시야 첨부터 환한 데모크라시가 국시지, 반공은 그 영원한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오직 하나의 수단도 아닙니다.
망상은 자기만을 예외로 세우자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입니다. 교만입니다. 무책임입니다. 나만 군인인가요? 나만 나라 생각하나요? 내 눈만 정치의 부패 무능을 보고 있나요? 다 아는 일입니다. 그 모든 군인이 그 순간에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치 바로잡자는 영웅심에 일선의 제자리를 떠나 무기를 들고 다 같이 서울로 향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군인들, 상사의 명령에 기계처럼 움직이는 졸병들, 여러분이 그렇듯 규율에 복종하니 나라는 되어갑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결코 인간성을 잃어서는 아니됩니다. 복종해도 복종하는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복종하는 것이요, 이 나라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진리에,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자유함으로만 얻을 수 있고, 평등은 평등하게 힘으로만 지킬 수 있고, 협조는 이기를 버려서만 이룰 수 있고, 평화는 폭력을 내버려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탱크 바퀴에 죽을지언정 대포에 절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도둑은 결코 이북에 있지 않고 내 속에 내 욕심에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역사의 대국(大局)을 내다보라
순진할 땐 양 같고, 그러나 한번 노하면 대양의 물결 같아 못 삼킬 것 없는 혼의 뇌관들, 역사의 정예부대들, 여러분은 잘 있지요? 건재하지요?
이런 것은 다 냄새나는 소리입니다. 속지 마십시요. 까닭없는 호의를 받지 마십시오. 터무니없는 위협에 놀라지 마십시오.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도 두 번 다시 생각해보고 번듯한 인물이 나타나도 그 살 밑을 캐어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주의해 잊지 말 것은 언제나 역사의 대국을 내다보기를 게을리 마는 것이요, 현실문제에 대하여는 분명한 판단을 가지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큰 눈을 뜨기만 하면 혹할 리 없고, 판단이 분명하면 자신이 생기는 법입니다. 대국이 무엇이요? 민주주의 완성이지. 판단이 무슨 판단이요? 자유냐, 독재냐지.
분열은 어디서 오나? 순(純)하지 못한데서 옵니다…가장 속기 쉬운 것은 감상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흥분시키는 일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4·19가 성공한 것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된 것은 맘이 맑았기 때문입니다.
교수는 여러분에게 지식 기술을 가르치겠으나, 여러분은 교수에게 영감을 주어야 합니다. 호르몬 주사를 저들에게 주어 늙지 않게 해야 합니다.
#민중에게! 잠을 깨고 힘차게 삶을 외치자
이젠 망했다 하는 그 생각이 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도깨비입니다. 깹시다! 살을 꼬집고 혀를 깨물어서라도 깹시다. 깨야 합니다.
민중들, 우리는 풀무입니다. 모든 지나간 역사의 녹슨 쇠가 거기 들어가면 다 녹습니다. 그것은 깨끗이 하는 곳이요, 갈라내는 곳입니다. 모든 오려는 역사의 바탕이 되는 쇳물은 거기서 나옵니다.
그곳은 지워내는 곳이요, 새로 하는 곳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가슴입니다…독재자 반역자까지도 죽일 생각을 하기보다는 녹여버릴 생각을 하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참 혁명은 아니됩니다.
그럼 생각합시다!
그럼 꿈틀거립시다!
그럼 겁을 내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를 외칩시다!
자, 이젠 일어섭시다!
일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