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사상 깊이읽기 3. 김영호. 711쪽
씨알·생명·평화
민중 · 씨알
희망을 가지는 것이 씨알입니다.
알갱이 없는 도토리는 도토리 아니듯
씨알 없이 나라 있을 수 없고,
희망 품지 못한 씨알은 씨알일 수 없습니다.
절대의 희망이 살아나면 모든 희망이 있습니다.
역사와 나라의 주체는 ‘어리석은 백성’이 아닌 민중, 씨알
민중사관에서 나타난 것처럼, 함석헌은 역사의 실체 즉 실질적인 주체로 종래의 사가들이 기술했던 군왕과 지배자를 대신하여 민중을 내세웠다. 나중에 민중은 ‘씨알’로 대치되는데 이 ‘씨알’ 개념은 잠재적으로 거대한 사상체계를 내포한다. 역사 기술에서는 ‘민중사관’이라 하고 사상적으로는 ‘씨알사상’이 정립된다.
씨알이 나라의 주인. 그것은 민주주의 아닌가?
옷이 아기를 위해 있지, 아기가 옷 위해 있는 것 아니듯이, 국가가 씨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어째 씨알이 국가를 위해 있다 하겠나?
인류사회는 부족주의에서 봉건주의로, 그리고 민족주으로 범주와 통치형태가 변천해왔다. 이제 다음 단계, 세계주의로 확대되는 단계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폐단을 가져왔다. 이제는 백성(인민), 민중이 나라의 주체라는 자각과 함께 민주주의로 이행했다. 그러나 아직도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국가가 많고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기형적인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함석헌이 민족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 수난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명실상부하게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함이었다.
옛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심판 없습니다. 역사의 심판이 있을 따름입니다. 역사의 심판이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역사의 심판은 민중 가슴속의 기록 없이는 아니 됩니다…하나님은 차라리 죽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민중은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이 민중이요 민중 속에 살아 있는 산 힘이 하나님입니다.(1965,『저작집』 제5권 246쪽)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마태복음」25장40절) 지극히 작은 자는 민중이다. 작지만 크다. 작다는 것은 낮단 말이다. 하늘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낮지만 땅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교회요, 나라요, 문화요, 세계요, 그것은 다 이 밑바위 위에 세운 축에 지나지 않는다. 밑바위가 한번 깨지면 그 깨진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게 무너져버린다. 민심이 살고서 흥하지 않는 나라 없고, 민심이 썩고서 쇠하지 않은 시대 없다. 그래 민중이 보이는 전체라 하는 것이다.
민民 자에 대한 우리말은 뭐라고 하겠느냐. 우리말에 없지요. “씨알이라고 그러면 좋지 않아?” 그런 말로 가볍게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대한 풀이는 별로 안하셨지요.
민중이라기보다는 ‘씨알’이라는 말이 좋을 거다 하는 생각에.
내가 생각하는 거는 그저 우리말에 ‘씨’란 말, ‘알’이란 말을 한데 붙여서 ‘씨알’이라 그랬는데, 참 좋은 것 같아 그대로 이때까지 쓰게 된 거지요..속뜻..내가 혼자서 단번에 하는 것보다는 두고두고 피차 써가면서 누구라 할 것 없이 뜻이 밝아지도록 하는 게 좋을 거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스승 유영모의 중국고전 풀이에서 빌린 ‘씨알’을 ‘씨알(아래아)’로 표기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영모가 그 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풀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함석헌이 사상체계를 가진 개념으로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씨알(아래아)’은 오염이 안 된 우리말
왜 새로운 말, 그것도 될수록 한자보다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야 하는가. 거기에는 언어철학적인 근거가 있다.
가장 압축된 기본 강령은 『씨알의 소리』의 목표로 설정된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 담겨 있다…이는’씨알 헌법’ 같은 것이다.
말이 말만이 아닙니다. 낱말 하나 밑에 문화의 전 체계가 달려 있습니다
…한국말이나 한글만이 살아나는 것 아니라 한국이 살아납니다. 토착화라지만 토착이 무엇입니까? 뿌리를 박는단 말입니다. 허공에 뜬 나무도 없고 허공에 뜬 문화도 없습니다. 모든 식물은 땅이 피어난 것이듯이 모든 문화도 정신적인 흙이 피어난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이 꼴인 것은 결코 지능·소질이 부족해서 아닙니다. 문제는 역사적 풍토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나 하는 데 있습니다…우리 잘못은…종자는 좋으면서도 뿌리를 박지 못한 데, 다시 말하면 제가 저를 모른 데 있습니다. 제 나라 지층 밑에 있는 석유를 몰라서 남에게 팔아먹었지만 무시한 것은 기름밭만이 아닙니다. 마음밭이요 글월밭입니다.
말은 생명입니다. 말은 사랑입니다. 그래 나는 모두들 “미스, 미스” 하니 한국엔 아가씨 없다, 미국놈 다 줘버렸다 합니다…우리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의 ‘나’를 찾기 위해 잃었던 말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씨알의 말은 어디 가고 외래어만 난무할까
카톨릭에선 아직도 믿는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말로 중얼거립니다…불교가 들어온 지 천 년이나 되는데 이제야 겨우 우리말로 옮긴 것이 나오려 합니다. 철학자들은 몇 사람만이 아는 학술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낡아빠진…사람을 업신여기던 봉건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민족은 씨알이 스스로 제 생각을 하는 데서 시작입니다. 씨알의 말로 해야지.
제 나라 이름조차 제 글로 못 쓰는 이런 겨레가 어디 있어요?…나라를 새로한다면서 어째 대한민국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이요, 살림 뜯어고친다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란 다 무엇입니까?…’고쳐’라면 어째서 ‘재건’이라 하며 ‘높은’이라 하면 얼마나 좋다고 ‘최고’라는 것입니까…책마다 잡지마다 보면 그저 ‘모럴’이요, ‘휴머니즘’이요, ‘레지스탕스’요…누구 보고 하는 말입니까. 그들의 머리는 아직 끼리끼리 살자던 귀족주의를 못 벗어났습니다.
한글 전용…우리말로 해도 되는 걸 구태여 한자로 어렵게 표기한단 말이에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외국 술어를 많이 쓰는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민중을 생각하지 않는 생각이라고 나는 그럽니다…
우리나라 말 중에 오늘, 모레, 글피, 그글피라는 말은 다 있는데 내일에 대한 순수 우리말이 없어요. 우리 민족이라고 내일이 없었을 리 없는데 내일이란 말이 없거든요. 내일을 잃어버린 민족입니다.
계급으로 민중을 통솔하는 국가는 없어져야
자연대로가 아닌, 사람이 생각해낸 인위적인 문명이 생긴 데서 폐단이 나오고, 그로부터 높고 낮음이 생기고, 그것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 국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를 사는 우리의 문제는 국가관념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 봅니다. 민중 위에 계급이 있어서 민중을 통솔해야 한다는 국가관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저는 초국가주의예요…이제는 씨알들이 차차 깨어서 자신들이 속아왔다는 것을 아니까 탈국가해야 한다, 국가란 그런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급은 민중을 통솔하기 위해 구성된 국가의 지배도구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를 바탕으로 이룩한 문명과 문화는 자연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산물이다.
비폭력·평화
여러 운동 중에 평화운동이 있고
여러 길 중에 평화의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꿈틀거림이 곧 평화운동이요, 평화의 길이다.
그러므로 평화운동에서 가능불가능을 물어서는 아니 된다.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당위요 의무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하자는 결심이 있을 뿐이다.
혁명은 일로는 이루면서 정신으로는 잃는 것이요, 병은 고치면서 아이는 죽이는 것이다. 목적은 선하면서 수단은 나쁜 것이 혁명이다. 그리고 수단이 나쁠 때 목적의 선은 남아 있지 못한다. 목적은 끄트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과정의 순간순간에 들어 있다. 수단이 곧 목적이다. 길이 곧 종점이다. 길 감이 곧 목적이다. 그러므로 도라는 것이요. 길 감이 바로 하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이기 때문에 도덕이라 하는 것이다.
군사혁명?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 하는 것이 모든 혁명가가 외치는 구호지만 속는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 변명 밒에 얼마나 많은 죄악이 행해지고 있나? 역사에 혁명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961,저작집,제2권28쪽) (진선진미,신영복)
도는 길, 곧 목적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만, 노자·장자의 도는 길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한없이 크고 넓고 깊은 것이다. 삶의 근본, 있음의 밑바닥이다.
자기희생.
사랑으로 사는 싸움입니다….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저쪽의 양심에 있어야 합니다. 무기를 저쪽의 손에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속에 갇혀 잠자고 있는 혼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라는 나라 자신이 세우는 것이요, 민족은 민족 자신이 건지는 것입니다. 누가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 씨알 스스로의 의요, 죄악도 스스로의 죄악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진정한 국민운동에만 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종교·도덕이 다 자기를 절대화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곧 죄요 악이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혁명?
첫째, 그것은 청천백일하에 드러내 논 반항이다…몰래 하면 악의가 들어 있다.
둘째, 그것은 폭력을 쓰지 않는 싸움이다.
셋째, 그것은 조직적인 운동이어야 한다.
비폭력만이 참 혁명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길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역사를 이끌어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어지럽고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이제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있다면 다만 하나 비폭력 혁명이 있을 뿐이데, 그것을 하지 않는 한 모든 생각, 모든 노력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살려면 전체,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 뺀 전체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99퍼센트라고 전체가 아닌 담엔 당파입니다. 그러면 반작용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단 하나가 죽어도 억만 군의 공을 무의미로, 무가치한 것으로 만듭니다. 지난날은 또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앞의 세계는 그럴 것입니다.
전체가 일어나는데 무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강제가 어디 필요합니까?
분노하는 민중이라야 산다.
민중이 노해야 한다. 한 번 크게 노염을 내야 한다. 노하는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나…이 우주가 늙지 않고 썩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노여워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노염이 무언가? 생명의 프로테스트다..생명은 스스로 폭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스스로 노여워하는 이다.
시민이 한 번 노하면 그것이 미국의 독립이 되었고, 베르사유의 노동자가 한 번 노하면 그것이 온 유럽을 뒤집어 천년 이래의 봉건제도를 다시 일어날 수 없이 부숴버렸다. 민중이 노하지 않고 역사가 나간 일은 한 번도 없다.
이성계도 성공한 혁명가라 할 수 없다. ‘수난의 500년’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발단과 과정이 폭력적인 혁명이라는 데 있다.
조선왕조. 이 오백 년은 중축이 부러진 역사! 그것은 옳은 궤도를 밟아 바른 길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백 년 동안의 일은 그저 어긋남이요, 거꾸러짐이요, 깨짐이다.
우리는 평화주의자다
단군설화로부터 6·25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는 평화민족의 역사입니다. 전쟁이 있었어도 도둑 막은 싸움이지, 한 번도 남을 침략해본 일 없는 역사입니다.
개인주의를 넘어 전체주의로
우리 속에는 선의 씨가 살아 있습니다.
그 씨 속에는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시들었다가도 비만 오면
곧 파랗게 살아나는 이끼 모양으로
씨알의 마음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종굑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역사의 진행 과정과 사회 현상을 입체적으로 통찰하여 삶의 원리와 진리를 모색했다. 덧붙여 과학이 발견한 사실과 진리를 함께 참고했다. 그 결과 진화하는 인류가 진행하는 방향이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주의로, 더 나아가서 전체주의로 이행한다고 관찰했다.
종교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제시하여 새 시대의 앞장을 서야 할 종교가 아직도 개인구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절망 극복에서 산 희망의 원천이었던 절대자의 모습을 역사에서 찾으면 전체 민중에 있다…역사의 가짜 주체인 국가가 전체 민중 앞에 완전히 자기부정을 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예로부터 인심이 천심이라 했던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 민중이 전체로 생각할 때 절망은 절대 없다. 또 그밖에 세계구원의 길은 없다.
개인구원은 전체구원 속에서
전체 시대는 씨알의 시대
지금까지 문명은 일부 특별한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그런데 지금은…지금까지 내려오던 문명의 테두리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이 불편한 것이 돼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다른 것 아니고 곧 사람나다 “나도 나를 위해 직접 생각을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나 영웅이 아니라…내가…
혹은 말하기를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제어해가는 거라 하지만 모르는 말입니다.
민주주의의 표어는 전체입니다. 누구나 다 사람입니다. 하나도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자식이 내 자식
같이살기를 제창한 일차적인 동기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빈민계층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두 가지 사건이 그에게 영감을 일으켰다.
1964년 정원 남가좌동 어떤 불쌍한 아버지가 생활고에 쪼들리다 못해 비관하고는 제 손으로 세 어린 자녀를 빵에 독약을 넣어 먹여서 독살하고, 자기도 산에 가서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죽은 사건이 난 때였다. 그때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조선일보』에 그 소감을 발표했다…「3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 말씀」이라고 제목을 붙였었다…
그것은 하나의 항의요, 분풀이요, 원수 갚음이다. 누구에게 대해서? 이 무정·무책임한 사회에 대해서다. 그에게 이 사회는 동정도 불쌍히 여김도 없는…악독한 사회였다.
저밖에 남은 전혀 모르는 사회, 그런 인면수심의 사회에는 그런 것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보고 싶네, 보고 싶네, 엄마가.” 이것은 시입니다. 사람의 혼을 뒤흔드는 놀라운 시입니다. 어린 혼이 기아의 채찍에 맞아서 찍어지게 우는 소리입니다…밥만 못 멋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못 먹은 것입니다.
있어야 할 엄마가 왜 없습니까? 누가 뺏어갔습니까? 돈이 뺏어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있지만, 한 가지 잘못된 제도 때문입니다. 네 것은 네 것이요, 내 것은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 가족은 네 가족, 내 가족은 내 가족, 이 제도는 또 한 가지 잘못된 철학에서 나왔습니다. ‘생존경쟁’이란 것. 다 거짓입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역사는 하나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붙듦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힘의 숭배자들입니다.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루어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힘센 자들은 저만 살려고 그런 제도를 만들었고, 그런 제도를 영원히 민중 위에 씌워두려고 그런 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생명의 단일성 원리에 배치되는 철학입니다. 그 제도는 힘의 숭배자, 힘센 자들이 만들어낸 철학이다. 경쟁이나 상쟁이 아니라 상부상조가 생명과 삶의 원리다.
새마을운동. 대통령이 시키는 일. 위에서 아래로 내리씌우는 권력의 운동.
같이살기 운동. 아래에서 위로 피어오르는 생명의 운동, 보람에 살자는 일인데, 뒤의 것은 이해에 살자는 일이다. 씨알엔 차별이 없이 하나로 하나를 살리자는 것인데, 새마을이란 데서는 내 말 들으면 살아라 아니 들으면 죽어도 좋다, 하는 차별주의다.
같이살기. ‘죽어도 같이, 살아도 같이’입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가 아니라, ‘죽어도 같이 살아도 같이’입니다. 같이 죽지 않고는 같이 못 삽니다…할 마음만 있으면 이제 당장도 됩니다.
잡혀간 동지를 뒷바라지하는 퀘이커가 모델.
민주화 등 사회운동에 헌신하다가 피해나 희생을 당한 동지들을 (가족을 포함) 돌보고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상생(같이살기) 정신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 모델을 퀘이커에서 발견했다.
씨알 헌법의 둘째 장을 알아야 합니다. “전체는 부분을 모아놓은 것보다도 크다.”
사람의 몸은 여러 부분이 하나로 되어 산 것이지만, 그 해부한 부분들을 전부 모아놓아도 산 사람은 아닙니다…
그 부분이 하나가 될 때는 어느 부분에서도 볼 수 없던 생명이 일어납니다.
전체가 소리를 낼 때 개인으로서는 누구도 할 수 없었던 혁명이 이루어집니다. 그때에 소리가 개인들의 입에서 나와도 그 개인의 소리가 아닙니다.
동지가 있어야 한다. 선은 혼자서는 못 한다. 죄도 인류적인 죄요, 선도 인류적인 선이다. 온 세상이 다 악해도 나 혼자 선을 행하여 하늘나라 간다던 것은 낡아빠진 종교다. 세상에 그런 더러운 맘이 어디 있나? 인류 전체가 죄를 범하지 않고 내가 죄인 됐을 리가 없고, 내가 선을 하려는 데 전체를 잊고 될 수 없다.
선이란 전체와 하나되는 것이다. 개인의 선은 감응을 통해서 전달되어 전체화한다. 선의 기준을 전체에 있다. 전체가 절대선이다. 하나됨 곧 전체가 선이다. 하나된 인류를 신도 어찌할 수 없다. 악이 있다면 그것은 갈라짐이다. 전체 속에 악이 낄 틈이 없다…죄가 있다면 전체가 진다. 가롯 유다도, 장발장도 홀로 악인이 될 수 없다.
같이살기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전체가 곧 나다.
바람직한 공동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앞으로는 남을 지배하는 큰 나라는 없어질 것이고, 서로 취미를 같이하는 조그만 공동체가 늘어갈 것인데, 우리가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잘못의 근본은 인간의 교만에 있으니 작은 것이 아름답고, 낮은 것이 좋고, 다툼이 없고, 강하기보다 부드러움이 이기는 길임을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살림이 돼야지.
장래를 봐서 인류는 새로운 문명단계로 들어가지 않고는 살길이 없어요. 소국가주의를 강조해야 되고, 소국가주의를 하노라면 자연히 공동체 살림, 조그마한 공동체 살림이 늘어가야 되는 거지요…(주민자치? 마을이 미래다)
‘혼의 힘’을 연마하는 공동체 훈련이 필요
함석헌은 농사·교육·신앙(종교)을 함께 나누는 농장을 송산농학원부터 천안 ‘씨알농장’, 강원도 안반덕농장까지 여러 차례 실험했다. 그것은 작은 공동체 실험에 해당한다. 마치 가족보다도 동지들의 집합체가 삶의 단위인 듯이 살았다.
우리가 이 씨알농장에 일하는 목적은 혼의 힘을 기르자는 데 있다. 혼의 힘을 길러 무엇 하나? 앞으로 있는 무서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나라도 그렇고, 인류 전체로도 그렇고, 반드시 어려운 대목에 다다를 것이다. 어째 그러냐?…무언지 모르게 그런 강한 직감이 있다. 이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다. 우리는 거기 순종하여 준비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이 앞으로 있는 싸움은 몸의 힘, 물질의 힘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혼의 힘을 가지고야 싸워 이길 것이다.
이제 이 물질주의 문명은 그 자체가 더 이상 그 싸움을 계속하여갈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게 되었다…이제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종교나 도덕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문명이 말하고 있다.
위대한 진리의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을 보아, 시재(now-here), 지금에 살려 한다…이름은 과거와 미래를 위한 것이지, 산 현재에 이름이 있을 여지가 없다. 이름은 땅에서 소용되는 것이지 하늘의 것이 아니다. 산 현재에 삶을 마무르자는 이 시간은 하늘에 사뭇 들어가잔 시간이다.
조직은 생명에 반대다. 생명에서 조직이 나오지만 조직이 생명은 아니다…조직이 무거워지면 정신은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조직은 될 수 있는 데까지는 적게, 간단하게 하는 것이 진리다. 조직은 무엇때문에 하나? 힘을 위해서다. 힘은 무엇을 하잔 것인가? 일을 위해서다. 인생은 일하는 존재다. 어떤 영적 종교도 일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
노자가 『도덕경』 제1장에서 표현했듯이, 어떤 이름이라도 일단 붙이면 무상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늘 한 가지로 가리키는 모순을 일으킨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이다.
이름을 붙였거나 붙일 수밖에 없는 모든 조직은 결국 우상이 된다. (죽은) 조직은 산 생명과 정신을 죽이는 도구로 전락한다. 명칭과 조직은 진리나 실체와는 동떨어진 개념일 뿐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작게 하는 조직이 참 조직이다. 복잡한 조직은 속이는 조직 죽이는 조직이요, 살리는 조직은 간단한 조직이다.
정치·경제
새 문명, 새 세계관, 새 인생관, 새 국가를 세우지 않고
우리 살길만을 찾을 재주가 없게 됐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혁명을 의미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정치에서 해방이 돼서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정치는 함석헌에게 종교에 버금가는 큰 관심 분야다…정치는 현실적으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세속권력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수난의 여왕’인 이 민족의 고통은 잘못된 정치, 통치 제도와 행위 때문에 초래되었다.
간디의 비유대로 정치는 우리 몸에 감긴 뱀과 같이 당장 씨름해야 할 문제로 꼽힌다.
정치는 위기에 처한 오늘의 사회를 배태한 근본원인이다.
예로부터 참 정치가는 새벽하늘의 별같이 드물었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지배를 목적하는 도둑들이었다.
정치가 도둑을 만들었다.
정치가 도둑질하기 시작…오늘 인류가 당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정치문제인데, 그것을 만든 것은 결코 평화에 살기를 본바탕으로 하는 민중, 곧 씨알이 아니고 정치가들이다.
오늘에 와서 인류가 문명의 위기를 자초한 것도 이기주의적 욕망에 기초한 정치만능주의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따져 들어가면 한마디로 어려움을 남에게 떠밀고 나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로 문제해결 절대 되지 않습니다. 정치는 욕심의 총결산입니다. 욕심 있는 사람은 문제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정치는 점점 더 폭력주의이기 때문에 인류의 멸망을 재촉할지언정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치..노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요. ‘부득이위지’, 곧 마지못해서 한다는 거예요.
소국과민. 나는 그전부터 대국주의가 세상을 망친다고 봤어요. 그런 뜻에서 현대에는 국가관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에서 거기에 앞장서 가니 걱정이에요.
거짓 선전과 헛된 구호로 세뇌하는 정치
정치는 첨부터 도둑질로 시작됐을 것입니다. 본래가 그와 같이 부자연스러운 싸움이란 것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시끄럽습니다…정치는 생트집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그러진 주장을 해서 저쪽을 격분시키고 격분해 항의를 하면 그때는 정의의 이름으로 토벌을 하여 나라 땅을 넓히고 남의 민족을 잡아 종으로 부려 나라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꾸미고 칭찬하기 위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면 문화가 오라간다는 것이 정치철학의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정치와 전쟁은 첨부터 부조리였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거짓 선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더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일부러 시끄럽게 하는 것은 그러고서야 사람에게서 생각하는 여유를 뺏을 수 있고 생각을 못하여야 지배할 수 있고, 지배하여야 제 받을 심판을 연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해서 오늘의 정치는 시끄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가 이렇게 어려워진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지럽고 더러워진 것은 정치업자들 때문이다. 해방 이후 얼마 아니 되는 시일 동안에 나라가 이렇게 못쓰게 된 것은 그 죄의 대부분이, 누가 나오라지도 않는데 제각기 민중의 대표라 하고 나선, 하룻밤 사이에 제 손으로 만든, 정치 벌이꾼들에게 있다.
다른 것도 있지만 주로 정치가 잘못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겁니다.
중앙집권은 통치제도의 퇴행을 의미한다.
정치는 뭐냐, 딴 게 없어. 골고루 잘 먹고 잘 입게 하는 거야. 그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
정치는 종교를 통해야
한마디로 이 정치가 왜 이렇게 어지러우냐. 아직 자지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저마다 나라 하겠다고 일어서기 때문 아닌가? 그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다고 하면서 눈뜬 사람을 잡아 먹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자기를 발견하려면 욕심을 죽여야 한다.
사람을 절대로 정치나 법이나 감옥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어떤 위대한 정치가 법률가도 무명의 씨알 일반이 성현으로 대접하는 인물들을 존경하지 않고는 될 수 없었습니다.
민족분단의 책임도 정치인에
나쁜 것은 자기중심적인 야심이다.
북구의 나라들이 정치혁명 모델
대국가보다는 소형 국가에 강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와 북구의 여러 나라들입니다. 이들 소국은 대국보다는 훨씬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와 같이 정치에는 지금 국가의 노선만이 아니라 다른 노선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지도자란 것은 감정에 호소하여 한때 소동을 목적하는 야비한 정치가뿐이요, 참 의미의 인류의 사표는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제1류의 인물은 정치에는 아니 나섭니다. 대다수의 의견이라 하지만 대다수란 최고는 아닙니다. 최고의 이상이란 어느 시대나 대다수의 군중에 의하여는 배척받고 타기당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다수의 의견이란 항상 과오에 빠지기 쉬운 것이요, 이른바 비상시라 하는 시기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국토개발보다 마음밭 가꾸기
국토개발을 참으로 하려거든, 참 국토가 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참 나라 터가 어디야요? 여러분의 가슴입니다…나라는 흙 위에 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잘 개발해야 합니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를 했다 해도 참이 아니다.
민중을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버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박정희님에게! 남은 길은 공약 준수뿐
‘내란 음모’라고 왜곡된 광주사태는 반드시 바로잡혀야 합니다. 역사에서 이걸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면 이 민족은 낙제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광주사건이 있는 그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이놈의 나라 큰 결딴이 날 겁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소유권 문제다. 지금까지 인류 사회를 지지해온 것은 소유권은 신성하다는 사상이다. 거의 자연율처럼 알지만 아니다. 인간이 역사를 지어오는 동안 경험에 의해 얻은 도덕이다.
사람들이 자연대로 살 때는 노동문제 없었습니다…그러니 돈이 소용 없고, 돈을 모르는데 문제가 무엇입니까?….돈 어디서 나왔습니까? 남을 부려먹고 저는 놀 뿐 아니라 제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려는 저 지배자가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경제학·정치학 할 것 없이, 노동문제의
근본 해결은 오직 씨알 자신에게 있습니다. 제 인격을 돈 받고 팔아넘기지 않은 일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돈이 없을 것
미래에는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또 하나는 돈이 없어질 것입니다.
돈 없이 어떻게 살아요 그러지만, 사실은 이 돈 때문에 이렇게 못사는 거야요.
노자의 세 가지 정신-자비(베풂)·검약·자기낮춤(평등)
첫째는 헤가림, 불쌈히 여김입니다. 둘째는 졸라맴, 수수하게 함입니다. 셋째는 감히 남보다 앞장을 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국민총화와 안보를 말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한 말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모든 말이 다 소용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데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또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골고루’라는 말입니다. 화(和)는 고르게 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먹을 것을 골고루 먹어야 합니다. 국민을 골고루 먹이지 않고 총화하자는 것은 어리석을 말입니다.
함석헌은 종교·농사와 더불어 교육, 이 세 가지를 삶의 주축으로 생각했다.
정신·영, 생명·생태
생명에는 나와 남이 없습니다.
나, 너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연에는 나 너 없습니다. 그저 하나입니다.
교육은 사람(교사·정치가)이 아닌 하늘(생명·씨알)이 하는 것
교육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선 교육은 인위와 강제보다는 하늘, 자연, 생명에서 나온 씨알처럼 사람을 기르고 가꾸는 것이다.
요약·종합
종교사상, 인식(앎)과 실천, 역사관, 민중·씨알, 비폭력·평화, 개혁·혁명·진화, 민족주의·국가주의·세계주의, 전체주의, 정치·경제·사회, 정신(영)·생명·환경·생태
배타주의와 다원주의를 구분하면서 함석헌은 이렇게 선언했다. “한 종교의 절대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다. 한 종교에 이르는 것은 모든 종교를 통해서만 될 일이다.” 1959, 저작집, 3권60쪽
“한 가지만 아는 자는 그 하나도 모르는 자다”
샤르뎅
함석헌 사상은 역사와 현실의 장에서 건져낸 삶의 지혜이며 실천원리를 담고 있다. 그는 그 시대 어떤 지식인보다 용기 있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어떻든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개인과 그 연장인 집단, 민족 중심의 개인주의-민족(국가)주의를 초극하여 완전한 ‘전체’로서 공생하는 새 단계로 나아가자는 사상으로 대미를 장식한 함석헌의 사상사적인 위치는, 세계에 알려진다면, 한국을 넘어 세계사상지도에도 등재될 만하다고 믿는다.
그러한 ‘선견지명과 신념’을 가진 인물이 다른 데가 아니고 우리와 같은 시공에서 같은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면서 바로 가까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축복이었다.